도쿄 여행 07
2017년 10월 12일 목요일
눈이 일찍 떠졌다. 여지없이 6시가 넘어서니 잠이 깼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 것은 맞는 속설 같다. 어려서는 그렇게 아침잠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이젠 아무리 늦잠을 자고 싶어도 6~7시면 눈이 떠진다. 그러니 낮과 밤이 바뀌었다고 자녀들을 달달 볶을 필요 없다. 늦잠도 잘 수 있을 때 많이 자두는 게 좋다.
아침은 호텔 조식으로 해결한다. 기대감을 가지고 내려가니 작은 홀이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갖춰져 있다. 아침 7시가 넘은 시간에도 이미 사람들이 꽤 있다. 모두들 조용하게 움직이고 조용하게 먹는다. 직원들은 친절하고 음식들은 풍요롭다. 어색하지만 어쩐지 푸근한 분위기라 혼자여도 낯설거나 뻘쭘하진 않다. 일반 조식이 아니라 일본 향토 음식들이라 미리 홈페이지에서 어떤 음식들이 나오는지 대강 봐 뒀다.
정신없이 가져오다 보니 조금씩 담는다고 담았는데 금방 배가 부르다. 직접 사 먹지 못했던 몬자야키도 나오고 몬자야키 고로케도 나온다. 소고기 힘줄이 들어가 있는 계란말이는 굉장히 부드럽고 맛있다. 스모선수들이 체력을 위해 먹었다는 시오찬나베는 국물이 시원하고 안에는 채소가 알차게 들어가 있고 고기 완자가 한 끼 식사로 든든하다. 그 밖에 각종 일본식 조림류 반찬과 바지락 밥은 꿀맛이다. 소바도 한 그릇 먹고 오늘은 시사모가 나와서 시사모도 몇 개 가져다 먹었다. 사케랑 먹으면 딱 좋겠구먼.
조식은 매일 약간씩 바뀐다. 오늘이 시사모였다면 다음날은 연어구이. 이런 식이다. 시즌별로 나오는 메뉴들도 달라지니 갈 사람은 미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가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사진은 첫날은 찍지 못하고 둘째 날만 찍었다. 둘째 날은 양을 줄여서 가져왔다. 샐러드와 조림 반찬, 몬자야키 고로케, 연어구이, 시오찬나베. 그런데도 다 먹으니 배가 부르더라. 기대했던 만큼 맛있는 조식이었다. 다만 이것은 개인적인 기준이므로 일본식 음식과 반찬류가 입에 안 맞을 수도 있다. 나는 저렇게 먹고 다시 쌀밥과 카레를 떠 와서 또 먹었다. 그렇게 먹어치웠는데도 결국 먹지 못하고 온 음식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오전 일정은 나카메구로 블루보틀과 에비스 맥주 기념관 가는 일정이다. 그렇다. 고작 커피와 맥주를 마시러 그곳까지 간다. 먼 거리는 아니나 그렇다고 일부러 들려야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카메구로 블루보틀을 방문하기로 한 것은 이곳이 그나마 한적하다는 후기들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들어온다는 소문이 무성한 블루보틀은 커피 맛이 훌륭하며 심플하고 단순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커피의 애플이라 불린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탄생한 블루보틀은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에만 들어와 있다. 지역별로 지점이 여러 군데 있지만 신주쿠, 시부야 등 하필이면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지역에 많다. 매장 인테리어도 인테리어랄 게 없이 단순하고 심플하다. 게다가 앉을 공간 자체도 많지 않아 사람이 많은 지점에는 앉아있는 사람보다는 서있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그런 곳에 가서 주문을 하고 서서 부대낄 여력이 없어서 나는 일찌감치 블루보틀 가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커피의 천국인 일본 도쿄엔 맛있는 노지 카페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동선이었다. 노지 카페들을 찾아다닐 만큼 내 일정이 여유롭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나마 동선이 비슷한 곳에 있는 나카메구로 블루보틀을 찾아가기로 했다.
나카메구로 역까지는 한 번 갈아타고 30분이 훌쩍 넘겨 가야 했지만 처음으로 해보는 환승구간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출근 러시아워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오전 9시가 넘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역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역에서 나와 걸어가는 나와는 반대방향으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걸어와서 마치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 떼들 속을 헤집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곳이야말로 자전거의 천국. 좁은 인도에 자전거를 탄 젊은 남녀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사쿠사에서 본 자전거는 자전거가 아니었다. 이곳은 출근길 교통수단이 거의 자전거인 듯 보였다. 아니면 역까지만 가서 다시 지하철을 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어!
그나저나 햇빛이 장난이 아니다. 아침부터 다 태워 죽일 듯이 쨍쨍하게 기승을 부린다.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햇빛이 그대로 내리 꽂혀서 가져온 양우산을 폈다. 우산 대용 겸 작은 양우산 하나를 챙겨 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런데도 어찌나 해가 강한 지 얼마쯤 걸으니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나마 습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카메구로는 봄이 되면 메구로 강가의 벚꽃이 특히 아름답고 그 주변에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많아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시간이 된다면 이 고요하고 한적하면서 예술적인 기질이 충만한 곳을 찬찬히 둘러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햇빛이 나를 태워 죽일 듯 쏘아대는 속에서 오로지 블루보틀 라떼를 마시기 위해 바삐 걷고 있다. 찾기는 어렵지 않은데 들어가서 깜짝 놀랐다.
얼굴이 벌겋게 익어서 들어간 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다. 그러니까 앉을 공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좋을 곳이었다. 중앙에 철제 테이블 하나와 그 앞에 2인용 의자 2개가 전부다. 그 외엔 밖에서 앉아 마실 수 있는 바 테이블이 있고 아래층에도 공간이 있지만 손님들을 위한 공간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갔을 땐 이미 자리가 다 차 버려서 중앙 철제 테이블에 자리가 남는 것 같아 털썩 주저앉았는데 알고 보니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젊은 아줌마들이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둘러보니 관광객은 나뿐이고 동네 주민들이 여유롭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마치 아이들 유치원 보내 놓고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우리나라 젊은 엄마들 같은 느낌이다. 그 외엔 가는 길에 들려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문하고 밖에 나가서 앉아 있을걸 일본 아줌마들하고 본의 아니게 같이 마셔야 하나 싶을 때 2인용 테이블에 자리가 나서 냉큼 앉았다. 이 더운 날에 문을 다 열어놓고 에어컨은 켜지도 않아서 나 혼자 너무 얼굴이 벌게져서 헉헉 거리고 있어서 진정시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어쩐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곳에 와 있다는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 와중에 블루보틀 인턴쉽 교육이라도 있는 것인지 젊은 남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카운터에 있는 바리스타와도 인사를 나누고 빙 둘러서 서로 소개를 한다. 모두들 눈이 반짝이는 걸 보니 이제 막 뽑혀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직원들 같아 보였다. 아마 아래층 공간에서 교육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날이 더우니 아이스 라떼 싱글 오리진으로 시켰다. 이곳은 이름을 적고 메뉴가 준비가 되면 그 이름으로 불러준다. 테이크아웃을 묻는 질문에 이곳에서 마실 거라고 했더니 로고조차 찍혀있지 않는 길쭉한 유리컵에 준다.(유리컵에 로고 찍을 돈이 없었나?) 한국에서라면 유리잔에 마시는 것을 더 선호했겠지만 누구나 인증샷으로 찍는다는 블루보틀 로고가 없으니 우리 집에서 마시는 미숫가루 같아 보여 찍을 맛도 안 났다. (그래서 초점도 다 나갔다)
아이스 라떼 맛은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했다. 밸런스도 괜찮고 너무 밋밋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맛 때문에 굳이 지하철을 갈아타고 올만한가에 대한 질문에는 선뜻 오케이라고 하지 못하겠다. 이 정도 맛 좋은 카페는 많기 때문이다. 여행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여행이란 항상 일상에서 어느 정도 일탈하는 거니까, 커피 때문에 달려올 수 있는 것이다.
맛있는데 양이 적어서 야금야금 아껴서 마셨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스는 얼음이 녹아버려 나중에는 맛이 달라지니 무한정으로 느리게 마실 수도 없다. 땀이 식고 조금 여유가 생기니 그제야 등을 기대고 찬찬히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이번 도쿄 여행은 뭔가 미션 클리어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구글맵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가니 그곳을 실제 갈 때마다 속으로 '미션 클리어'라고 외치는 기분이 된다.
시간이 지나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어온다. 관광객들도 오가고 현지인들도 다녀간다. 한 백인 커플이 커다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밖에서 커피를 주문해서 마신다. 개와 커플의 느낌이 너무 완벽하다. 완벽한 모닝커피랄까. 나카메구로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 커플을 보면서 했다.
계획대로라면 블루보틀에서 한 껏 여유를 부리다가 에비스 역까지 걸어가는 거였지만 날이 너무 덥다. 햇빛은 좀처럼 약해질 기미가 없다. 구글로 나카메구로에서 에비스까지 가장 빠른 경로를 탐색해 본다. 바로 맞은편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내가 산 교통카드로 버스도 탈 수 있다. 도쿄 버스는 한국과 같은 시스템이다. 앞에서 카드를 찍고 들어가 뒷문으로 내리면 된다. 뙤약볕에 버스를 기다리다가 탔다. 버스 안은 나른한 공기가 가득하다. 당연히 꾸벅꾸벅 졸다가 간신히 내렸다.
길을 조금 헷갈려서 언덕을 힘들게 넘어가는 바람에 얼굴이 다시 땀으로 범벅이 된다. 맥주 기념관을 왜 가는 걸까. 아침을 든든히 먹고 온 터라 밥 생각이 나지 않았다. 원래는 블루보틀 커피를 마시고 에비스로 넘어와 맛있는 함바그 스테이크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배가 꺼지지 않아 대신 맥주를 선택했다. 아침부터 맥주라니.... 나도 참 대단하다.
에비스 가든플레이스에 에비스 맥주 기념관도 같이 있다. 맥주 기념관뿐만 아니라 다른 쇼핑과 먹거리가 함께 있어 시간이 있다면 천천히 둘러봐도 좋다. 나는 갈길이 바쁘니 직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내 직원이 다가와 팸플릿을 나눠준다. 중앙 계단 밑으로 보이는 대형 구릿빛 솥이 웅장하다. 기념관 관람은 입장료가 있다. 물론 그 안에 테스팅도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관람은 필요 없고 맥주만 목구멍으로 넘기려 왔으니 곧바로 내려가 맥주를 마시러 간다. 여기 여성 직원분들 모두 귀엽다. 나는 일어가 안되고 이 분들은 영어가 안되니 서로 손짓 발짓 까르르 웃어대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평소의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 분들이 쓸데없이 상냥하고 귀여워서 말을 더 걸게 되더라.
분위기는 눈 오던 삿포로 맥주박물관이 더 낫지만 이곳은 더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게다가 이 시간에 오니 사람도 없다. 일본인들 몇몇이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맥주는 코인으로 사서 마실 수 있다. 코인 자판기가 따로 있고 내가 마신 테스팅 세트는 코인 두 개 값인 800엔이다.
세트는 일반 에비스 맥주, 코하쿠 맥주, 스타우트 맥주로 구성되어 있다. 테스팅 잔이라 생각보다 크진 않다. 맛있는 건 단연코 가운데 있던 코하쿠 맥주다. 정말 부드러움이 예술이다. 코하쿠가 호박이라는 뜻으로 호박 맥주라고도 하던데 한 잔 더 마시고 싶었다. 다음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호박 맥주를 큰 잔으로 마시리라.
천천히 마시려고 했지만 단숨에 마시고 한숨 돌린다.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메모도 하고 영수증 정리도 하고 사진도 찍고 건너편에 혼자 온 한국 관광객도 흘깃거린다. 아무래도 나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고 귀여운 안내 직원한테 다시 가서 수다를 떨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감정은 조금 느닷없었는데 단 한 번도 혼자 여행하면서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싶다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래서 나이가 들면 누구든 붙잡고 주절주절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가. 병원에서 눈만 마주치면 말을 걸어오던 숱한 할머니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이기적인 대화법이다.
상대방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교감을 나누는 대화를 원하기보단 나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고 싶은 거다. 사실 우리 모두는 쌍방향 대화에 인색하다. 따지고 보면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거나 하고 싶은 내 이야기를 생각할 때가 많다. 시계를 보며 집에 갈 시간을 가늠하거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적당한 리액션을 해주는 것 말이다.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두고 수시로 울리는 톡 알람을 확인하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있었지만 함께 있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들었지만 톡 안의 누군가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점점 더 둥글어지는 지구 위에 사는 우리로썬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렇다면 진정한 대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눈으로 다시 커피와 맥주를 마셨다. 불행히도 나는 앞으로 영영 커피와 맥주는 자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희락의 비중으로써 커피와 맥주가 내 삶에서 차지하는 크기가 꽤 커서 앞으로 이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 넣어야 할지도 고민된다. 헛다리 짚는 여러 검사들을 전전하던 끝에 하룻밤 기계를 부착하고 자고 나서 나는 부정맥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사실 이 글은 애잔하다. 마실 수 있을 때 더 많이 마셔둘걸. 부정맥 진단과 그에 따른 여러 단상들은 또 다른 기회에 적어보기로 한다. 우선은 도쿄 여행을 끝내야지.(어느 세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