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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01. 2017

무지북스에서

도쿄 여행 06

2017년 10월 11일 수요일


'카페 드 람브르'에서 나오니 거리는 깜깜해졌다. 반대 방향인 '무지 유라쿠초점'을 향해 걸어가면서 후회했다. 내가 왜 가기로 했을까? 달달한 커피 한 잔에 괜한 짓을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걷다 보니 허리가 다시 아팠다. 나는 많이 걸으면 다리가 아픈 게 아니라 등과 허리가 아프다. 한 번씩 허리를 숙일 때마다 뼈마디가 꺾이는 기분이 든다. 동선을 잘 못 짰다. 계속 반대 방향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차라리 카페에서부터 시작했으면 낫았을걸. 


물론 먼 거리는 아니다. 걸으면 걸을 수 있는 거리다. 다만 허리가 아프니 문제였다. 그래도 긴자의 밤은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정갈하게 서있는 고층 빌딩 숲을 거닐면서 산책하는 것 같았다. 아마 일상에서 떠나와 있으니 가능한 일일 게다. 신호등에는 무표정한 퇴근길 일본인들이 많았으니까. 예전 서울에서의 내 모습도 비슷했겠지. 출퇴근길에 서울역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관광객들을 많이 봤었다. 서울역이야 말로 출퇴근길 직장인들과 한국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접점 지역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인양품 유라쿠초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무지 북스 때문이다. 처음 맘먹었던 대로 도쿄 서점 관람은 다 못하더라도 한 군데 정도는 들려보고 싶었는데 이왕 타이칸야마 츠타야를 가기로 한 김에 츠타야와 비슷한 노선에 있는 무지 북스도 들려보자 마음먹었다. 마침 긴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지 북스가 있었다. 츠타야와 무지 북스는 비슷한 듯하면서 전혀 달랐다. 츠타야가 도서를 기반으로 라이프를 보여주는 곳이라면 무지 북스는 무인양품이 내세우는 라이프를 기반으로 도서를 곁들인 셈이다. 츠타야는 이미 지점이 여러 군데 생긴 반면, 무지 북스는 이제 시작해 나가는 단계이기도 하다. 


2층에서 시작해 3층까지 연결된 나선형 계단으로 뻗어 있는 서가


바로 들어가서는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어디에도 내가 찾던 서점이 안보였다. 2층에 올라가서야 제품들 속에서 상징적으로 진열된 나선형으로 뻗어 있는 서가 진열대를 봤다.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듯 도서가 진열된 서가는 3층까지 뻗어 나간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볼 수 있다. 


3층의 서가 구성


무지 북스는 제품들을 구경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품과 관련된 주제로 진열된 책들도 뽑아보게 된다. '독서의 신' 저자인 마쓰오카 세이고가 아이디어를 내고 책을 직접 골랐다. 그는 요리에서 사용하는 조미료 '사시스세소'(일본어로 설탕, 소금, 식초, 간장, 된장이 히라가나 표기에서 한 글자씩 가져왔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일상생활의 사시스세소'로 서가를 채웠다. 


일상생활의 '사시스세소' 중에서 '세'에 해당하는 서가


그래서 무지 북스는 무지 북스만의 서가 분류법으로 나뉘어 있다. '사'는 책, '시'는 음식, '스'는 소재, '세'는 생활과 인생, '소'는 옷이다. 그 분류법에 따라 물건과 책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일본어는 읽을 수 없어도 책들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한다. 왜 즐거운가? 따지고 보면 나는 책을 사러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는 게 아니었다. 시내 한 복판에 있는 교보문고라는 공간이 주는 감각을 느끼려고 가는 것이었다. 책들 사이를 거닐며 맘에 드는 책을 꺼내보고,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쉬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 모두 한 공간 안에서 가능하다. 솔직히 나는 리뉴얼 이전의 교보문고를 더 사랑한다. 미안하지만 교보문고는 츠타야가 될 수 없었다. 왜 리뉴얼 이전의 교보문고를 더 사랑했는지 츠타야를 다녀와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암튼 이곳 무지 북스도 즐거웠다. 책들 구경을 하다 보면 물건들 구경을 하게 되고 물건 구경을 하게 되면 책을 보게 된다. 나는 일어를 잘 모르니 물건들 구경을 더 하게 되었지만 곳곳에서 책을 펴 들고 있는 일본인들을 봤다. 책이 메인은 아니지만 좋은 양념 구실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무지 북스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더 발전하게 될지 궁금해졌다.


무지북스에서 사온 간식거리들


난 사실 무지 제품들엔 환장하는 사람은 전혀 아니다. 특유의 담백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지만 내게는 일부러 돈을 주고 사야 할 만큼 탐나는 물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거기서 사 온 것도 몇 가지 간식거리들이 전부다. 몇 백 엔짜리 간식 봉지들 앞에서 한참을 구경하며 무엇을 고를지 고민했다. 건딸기가 들어있는 화이트 초콜릿 과자는 할인해서 두 봉지 샀고 가운데 캐러멜은 딱 내가 기대했던 맛이다. 더 사 올걸. 맨 오른쪽(사진)은 우리나라 오징어 땅콩 같은 과자다. 저녁 맥주 안주였다. 더 사 올걸. 그 옆에 오징어체 같은 건 그 안에 무슨 검은 씨앗 말린 게 들어있는데 이게 또 고소하고 맛있다. 이것 역시 맥주 안주로 해치웠다. 더 사 올걸.


오징어땅콩 같다. 맛있다.


무지 북스에서 나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 지하철을 타고 아사쿠사로 돌아왔다. 아사쿠사 이온몰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다. 올 때부터 아침은 호텔 조식, 점심은 한 끼를 잘 사 먹고 저녁은 편의점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나는 맛집 여행을 온 것도 아니고 저녁엔 숙소에 들어가 편하게 맥주를 마시고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비스 맥주를 사고 컵라면과 닭가슴살 샐러드를 하나 사고 커피로 만든 컵 푸딩도 두 개나 샀다. (이상하게 왜 일본 편의점에만 가면 먹지도 않는 푸딩을 꼭 사는 걸까)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면과 샐러드


호텔로 돌아와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라면에 물을 부었을 때야 젓가락이 없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보니 라면도 샐러드도 심지어 컵 푸딩도 스푼이나 젓가락이 필요한데 계산하면서 챙겨주질 않았다. 나 역시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온 것이다. 말해야 챙겨주는 것인가? 손가락으로 먹을 수도 없고 호텔 객실 안에 비치되어 있을 리도 없다. 로비에 내려가 빌려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옷을 다시 입고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심지어 컵라면 물을 부어버린 상태라 한시가 급했다. 이온몰까지 뛰어갔다 올 수도 없으니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라면을 또 사고 젓가락을 달라고 했다. (이 라면은 내일 저녁거리다ㅠ) 젓가락 두 개를 챙겨서 다시 뛰어 왔다. 이곳 편의점에서도 말을 해야 챙겨주는 걸 보니 일본 편의점은 말을 해야 챙겨주는 것 같다. 아니면 도쿄만 그런가? 그리고 보니 내 기억 속에선 한 번도 내가 먼저 젓가락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 편의점에서도 컵라면 사면 젓가락을 담아주는데 도쿄 인심 한 번 야박하군! 암튼, 5분만 기다렸다가 먹으라는 라면을 10분 만에야 먹었지만 맛있었다.


일본 라멘은 무엇을 사와도 실패가 없다. 역시 맛있던 라멘.


면발은 탱탱 불었지만 난 원래 밥도 진 밥을 더 좋아하고 라면도 꼬들한 면보다는 푹 익힌 면을 좋아하니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다. 치킨 샐러드는 사 오지 말걸 그랬다. 원래 일본에서 닭을 잘 안 먹는다. 내가 고기도 살코기만 먹는 편이고 특유의 고기 비린내를 싫어하는 데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고기 비린내와 비계가 많다. 이 샐러드도 특유의 닭 비린내가 나서 남겨 버렸다. 에비스도 큰 캔을 사 왔다가 다 마시지도 못했다. 한 번 심하게 체한 이후로 먹는 양이 확 줄어버렸다. 에비스 맥주는 기대가 컸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판다. 아사히가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다. 홋카이도에서 너무 맛있게 마셨지. 


한국에서 일부러 챙겨 온 블루투스 스피커는 젠장, 충전을 안 해와서 금방 꺼져버렸다. 샤워를 하고 내일 동선을 체크하고 TV를 보다가 잤다. 일본 예능프로그램들은 여전히 우리나라 가족오락관 같은 분위기다. 뭔가 단체로 나와 왁자지껄하다. 채널을 돌리다가 보니 영어 프로그램이 있다. NHK 방송인데 영어 교육 방송이다. 어떤 상황의 생활 영어를 가르쳐 주는 것인데 일본 사람들의 영어 발음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영어도 못하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만 어쩜 저렇게 영어 발음이 구릴 수가 있을까. 차라리 그 방송에 나오는 외국인들의 일어 발음이 더 좋다. 그날의 상황은 로프웨이에 대한 것이었다. 로프웨이가 어디 있냐고 묻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로프웨이 가격이 얼마인지 묻는 것이었던가. 아무래도 대상이 저학년용인가 보다. 나도 아는 걸 보니, 진짜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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