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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Oct 28. 2017

타임머신을 타고 호박의 여왕을 마셔요.

도쿄 여행 05

2017년 10월 11일 수요일


긴자의 골목에 있는 '카페 드 람브르'는 1948년에 문을 연 융드립 전문 카페이다. 융드립을 처음 접한 것은 강남에서 일하던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였다. 그때만 해도 뭔가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많아서(지금은 전혀 없지만) 드립 커피를 배우러 다시 강남까지 가는 무모한 짓을 했었다. 그것도 퇴사한 회사 근처였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커피에 대해서 3개월가량 배우면서 드립 용품들도 사들이고 융드립과 사이폰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일부러 강남역 근처에 있던 사이폰 카페도 찾아가고 융드립 커피도 마시러 다녔다. 바리스타가 될 것도 아니고 카페를 차릴 것도 아니었는데 참 열정적으로 커피를 마시던 때였다.


각설하고, 카페 드 람브르에 가게 되면 내 나이만큼 오래된 로스팅 커피는 못 마시더라도 좋은 원두 추천받아 융드립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아아, 하지만 카페에 도착할 때쯤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게다가 계속 걸어 다니다 보니 선선하게 느껴지던 날씨도 더워졌고 간절하게 당이 필요했다.

앉아서 사람 없는 공간만 찍었다. 오래된 것들 투성이. 옛날로 타임머신을 다시 탄 것 같다.


카페에 들어서니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꽤 많았다. 바에 앉아야 융드립 하는 모습도 보고 사진 찍기도 편할 텐데 바는 이미 만석이다. 다른 식당에서는 한 번도 앉지 못한 맞은편 2인석 원형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카페의 첫 느낌은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도쿄에서도 노른자 땅으로 이름 높은 긴자의 한 복판에 이런 카페가 아직도 있을 줄이야. 모두 오래된 것들 투성이다. 카운터에 놓인 전화기부터 때 묻은 내부 인테리어까지. 카페에는 젊은 남성 두 분과 중년의 여성 한 분이 일하고 있었다. 젊은 남성 한 명은 자리를 안내하고 카운터를 지키고 다른 남성 한 명과 중년 여성 한 분이 바에서 일하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바에 앉은 긴자의 샐러리맨은 담배를 피우며 융드립을 하는 중년 여성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융드립 하는 중년 여성도 담배를 물고 앞에 앉은 남자와 깔깔 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능숙하게 융드립을 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목을 빼고 조금 더 보기 위해 일어설 뻔했다. 하루 일과의 피로를 씻어내며 깊고 진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어쩐지 따뜻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그런지 처음엔 이 담배연기 속에서 어떻게 마실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분위기에 취해서 나도 한 대 피우고 싶더라. 여기다 담배까지 배웠다면 아마 분명히 난 골초가 되었을 게다.


갖다 주는 영문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드립 커피 대신 Blanc et Noir 'Queen Amber'를 시켰다. Queen Amber는 차갑게 설탕을 넣은 커피에 우유를 띄운 샴페인 잔에 마시는 커피이다. Blanc은 불어로 희다는 뜻이고 Noir은 검다는 뜻이다. 이 작은 샴페인 잔이 820엔이지만 맛은 참 좋았다. 달달한 맛에 커피의 진한 맛이 스며들어 있고 우유의 맛도 적절하게 베어 있다. 라떼도 아니고 아메리카노도 아니다. 진하고 부드럽고 달았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서빙하던 직원분께 엄지손을 들어 보였다. 직원분들은 모두 친절하다. 앉자마자 시원한 물 한잔을 주고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물은 떨어지면 금세 채워준다.

blanc et noir "Queen Amber" 위아래로 blanc과 noir하게 나뉘어져있다.
blanc한 위의 모습.


옆 좌석에 한국 여성 두 분이 와서 앉았다. 자리와 자리 사이가 너무 좁았고 한국어가 고스란히 들려서 도저히 모른 척 시침 떼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한국분이세요?"라고 말도 안 되게 말을 붙였다. 당연히 한국어를 하는데 한국 사람이겠지. 우리는 서로 민망하게 웃었고 그 여성 두 분은 자리가 난 테이블 바로 자리를 옮겨 담배를 피웠다. 언제가부터 여행지에서 한국 사람들을 보게 되면 모른척하는 편인데 얼마나 반갑다고 아는 척을 하겠으며 몇 마디 말을 섞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가끔 같은 한국인으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일 때가 있다. 이번에는 너무 가까이 앉아있어서 눈을 자꾸 마주치기에 모른 척 하기가 애매해서 한 마디 했다가 결국 후회했다. 그녀들도 민망해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래된 로스팅 기계.


카페 드 람브르에는 여전히 창립자인 100세가 넘은 세키쿠치 옹이 나와 계신다. 처음에는 몰랐다가 카페 안을 구경한다고 일어나서야 알았다. 카운터 맞은편 작은 방 안에 세키쿠치 옹이 직원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고개를 숙여 소심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어쩐지 방해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48년도부터 운영하던 가게에 불과 얼마 전까지 직접 로스팅을 할 정도로 정정하던 분이었다. 한 평생 커피 속에서 살아온 장인은 결국 커피 속에서 죽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융드립을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갈고닦은 한편에서 무수히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쳐 가는 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이럴 때 일어가 능숙했다면 몇 마디 반갑게 얘기라도 나눠드리고 올 것을.


카페를 나오자 날이 어두워졌다. 일본 쇼와시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같던 카페 드 람브르.


다른 드립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길을 나선다.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고 달달한 '호박의 여왕' 덕분인지 유라쿠초 무지 북스에 가고 싶어 졌다. 나와서 한동안 카페 드 람브르 문을 바라보았다. 골목에 어둠이 깃들고 노란 불빛이 가득한 곳을 들여다보자니 진짜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본 쇼와시대로 다시 들어가는 타임머신 같아 보였다. 우디 앨런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났다.


안녕, 카페 드 람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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