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시의적절하구나
기생충: 한 생물체가 다른 종의 생물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 양쪽이 서로 이득을 취하면 공생(symbiosis)이라 하는 반면, 한쪽만 일방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경우 이득을 보는 생물체를 기생충(parasite), 손해를 보는 생물체를 숙주(host)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생충 - 비열할 수는 있어도 탐욕스럽지는 않다 (기생충, 서민)
영화의 줄거리는 딱 기생충의 정의와 같다. 기생충이었던 기태(송강호)네 가족이 숙주로 동익(이선균)네 가족을 선택해 기생하는 이야기다. 한국 영화 최초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임에도 보지 않고 있던 이유는 개인적인 감정이입이 많이 될 거 같아서였다. 왜 굳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얘기를 봐야 할까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기생충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지만 어떻게 보면 판타지였다. 영화를 보고 자려고 누웠는데 자꾸만 기태가 아들에게 모스부호로 보내던 편지가 생각나서 토할 것 같았다. 나는 기생충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기태가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다. 기태만 생각하면 속이 메슥거리고 토하고 싶은 기분이 되어서 이 영화를 역시 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굉장한 영화였다. 밟아도 밟아도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서 바퀴벌레처럼 어디에서 나올 것 같은 기태네 집 이야기를 행복한 기분으로 즐길 수는 없었다. 따로 줄거리를 옮길 생각은 없고 인물 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물론 결말과 반전도 나올 수밖에 없다. 스포를 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알아서 패스 하시길-
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장사, 대리운전까지 안 해본 것 없이 살았지만 지금은 지하방에서 가족과 함께 피자박스를 접어 살고 있는 백수 기태. 백수지만 뻔뻔할 정도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순응한다.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그저 무계획으로 살고 있는 인물이다. 소독차가 오면 이 기회에 집안 소독이나 하자며 만사태평이고 아들 기우가 친구 대신 학력위조로 부잣집 과외 선생으로 들어간다 했을 때도 '아들아 너는 계획이 있구나'라며 오히려 대견해한다. 계획이 없는 자신보다는 아들과 딸이 척척 해내는 계획이 그저 신날 뿐이다. 어떤 죄책감도 없이 동익의 운전기사로 입성하는 데 성공한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기태가 동익을 찌르면서 나오던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냄새 타령을 해대던 동익이 기어코 난장판이 된 가든파티에서 냄새에 코를 감싸 쥐었을 때 기태는 표정이 싹 변하면서 이성을 잃고 칼로 동익을 찔러버린다. 무능하지만 그저 사람 좋아 보이던 기태가 동익을 찔렀던 이유는 어떻게 해도 자신과 가족에게선 지워버릴 수 없었던 냄새 때문이었다. 같은 인간이지만 선을 긋고 자신을 밟아버리는 동익의 태도에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태는 다시 기생충의 삶으로 돌아간다. 기태의 선택이 나는 충격적이었다. 저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근세와 문광의 삶과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기생충의 삶이다. 이 엔딩이 너무 씁쓸한 것은 완벽한 비극이 이었기 때문이다. 그 비극의 정점에 서있던 게 나한테는 기태였다.
부자니까 착한 거야
기태의 아내 충숙. 전직 해머 선수로 메달까지 땄지만 현실은 고달프기만 하다. 욕을 입에 달고 거침이 없고 억척스럽다. 딸과 아들의 계략으로 동익네 집 가정부로 들어간다. 천연덕스럽게 자신한테 맡겨진 역할을 잘 해낸다. 근세의 폭주로 딸이 쓰러지자 눈이 뒤집혀 근세를 다시 찌른 것도 기태가 아니라 엄마 충숙이었다. 아들과 함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나와서 침수되었던 지하방으로 돌아왔을 때도 물건들을 닦으며 살기 위해 애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도 충숙을 통해서 나왔다. 부자니까 착한 거야, 이 한마디에 자신들이 하는 모든 짓을 퉁쳐버린다.
아버지 저는 이게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든 계획의 시작은 기우로부터였다. 학력위조를 하면서도 자신은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몇 번이나 떨어진 대학을 내년에는 꼭 갈 거기 때문이다. 결국 우연히 잡게 된 부잣집 과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족까지 끌어들인다. 무계획인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마무리를 짓기 위해 들어간 지하에서 근세에게 당하지만 살아남는다. 계속 웃기만 하다가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를 찾아다닌다. 아버지가 동익의 집에서 조명 불빛으로 보내는 모스부호 편지를 해석하고 기우는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계획은 꿈을 꾸는 것이다. 영원히 깨지 않으면 좋을 꿈... 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 말이다.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박소담이 연기한 기정이가 동익의 집 앞에서 '독도는 우리 땅' 멜로디에 읊던 대사는 '제시카 징글'로 유명해졌다. 이 장면은 동익의 막내아들 미술 치료사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거짓 정보를 만들어 노래하던 장면이었다. 기우와 함께 적극적으로 동익의 집에서 기생하기 위해 계략을 짠다. 기정의 가장 인상 깊던 장면은 침수된 집 화장실에 숨겨둔 돈뭉치와 담뱃갑을 찾아내고 정화조가 역류하는 변기 뚜껑에 앉아서 담배를 유유히 피우던 장면이었다. 기정이 어떤 인물인지 잘 설명해 주던 장면이었다. 살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기정이었지만 결국 근세의 손에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해
몰라 가끔 지하철 타다 보면 나는 냄새 있어
성공한 젊은 사업가. 아름다운 아내와 딸과 아들, 아름다운 집...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다 갖추고 사는 그는 겉으로는 매너 있고 교양 있는 사람이지만 속물이고 위선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선을 긋고 그 선을 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유독 냄새에 민감하다. 기태와 그 가족들에게 나는 냄새를 동익과 그 아들은 알아차린다. 빨래를 빨아도 지울 수 없는 지하의 쿰쿰하고 깊게 배어있는 가난의 냄새다. 아내 연교와 거실에서 나누던 베드신은 그런 위선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미세먼지가 없네요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다. 부자니까 해맑을 수 있는 것일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생각나는 캐릭터다.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모님. 기정과 기우의 모든 말들에 속아 넘어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 순진하게 내뱉는 말들이 은근히 터진다. 아들의 생일에 가족끼리 떠난 캠핑은 비가 많이 와서 취소가 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던 대사인 미세먼지가 없다는 말은 낮은 지대에 살던 사람들에겐 홍수로 물이 불어나 집이 침수되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동익의 가족이 집에 없던 틈을 타 술을 마시며 낄낄 거리던 기태네 가족이 간신히 빠져나와 비를 홀딱 맞고 지하방으로 돌아가던 씬은 두고두고 잊히지가 않는다. 부잣집 동네에서 계단을 끊임없이 내려와 걷고 또 걸어서 밑으로 밑으로 향하던 장면, 밑에서는 홍수가 나서 다들 똥물에 몸을 담근 채 짐을 빼내고 근처 체육관에 피신하던 장면들은 모두 수직으로 낙하하는 장면들이다.
7. 문광(이정은)과 그녀의 남편 근세(박명훈)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충숙 언니는 나쁜 사람은 아니야...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고 가장 좋았던 것은 이정은 배우가 맡은 문광이었다.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좋은 장면은 문광이 쫓겨나 비 오는 날 남편을 찾기 위해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던 장면이었다. 그전까지 문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교양 있는 모습으로 일을 척척해내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충격적으로 바뀐 모습으로 찾아온다. 복숭아 알레르기 때문에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우비를 뒤집어쓰고 비를 쫄딱 맞아 코끝에 안경을 걸치고 인터폰으로 하던 연기는 광기 어리기도 하고 너무 천연덕스러워서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그 장면에서 이정은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했다. 계속 돌려볼 정도로 좋았다. 두 번째로 좋았던 장면은 지하 깊숙이 숨어 지내던 남편 근세를 데리고 나와 몸에 올라타 마사지를 해주며 북한 억양으로 대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충숙이 발로 밀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뇌진탕으로 죽어가면서 하던 대사는 기생충이 또 다른 기생충을 향한 말이었다. 자신을 밀어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란 말은 결국 우리는 다 같은 존재라는 말이기도 하다. 충숙일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영화 속 가장 큰 반전이었던 근세의 존재를 이미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았기 때문에 충격은 덜했지만 연기를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고 큰 눈이 더 커 보여서 정말이지 광인처럼 보였던 근세 역의 박명훈 배우는 무서울 정도였다.
양극단으로 흘러가는 사회답게 한국에서 부자가 가난해지기도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도 불가능하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한국의 계층화 문제를 이토록이나 처절하게 보여준 영화가 있을까 싶다. 기태네가 처음부터 온 가족이 백수가 되진 않았을 거다. 그것을 온전히 기태가 가장으로써 성실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과 결핍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떠넘길 수는 없다.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고 사각지대는 더 넓어지고 이를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다면 개인은 살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기생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비극이 아니다.
내가 '기생충'을 재미있는 영화로만 볼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