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달리고 싶다
브런치에 어떤 글을 써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딱히 이 그릇에 어떤 글을 담아야 할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살짝 둘러본 이곳은 주절주절 허물없이 생각나는 대로 갈겨쓰는 곳은 아니기에, 일기는 일기장에란 말이 있듯이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보다는 조금 더 포커스가 있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렇다고 직업과 관련한 포트폴리오를 담기는 싫었고 그림일기 형식으로 해볼까도 싶었지만...
와우. 이미 그림 잘 그리는 분들이 너무 많더라. 이리저리 제하고 나니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영화, 음악 이야기 밖에 남는 게 없다.
워낙 잡식성 음악 취향인지라 스스로 공부도 할 겸 음악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는데.. 그 전에 앞서 영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것도 최신영화 위주가 아닌 나란 인간을 이루고 있는 추억의 영화들 말이다.
이름 하여, "내 인생의 영화다"
예전에 한창 라디오를 듣던 때 배유정의 영화음악을 참 많이도 즐겨 들었다. 특히 청취자들의 영화를 둘러싼 사연과 함께 음악을 소개해주는 코너가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났다.
이 글들은 결국 그 시절의 오마쥬가 될 것 같다. 매주 하나씩의 영화와 함께 그 시절 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한다. 넘버링이 언제까지 이어질진 모르겠지만. 영화의 정확한 정보와 내용보다는 그때의 내 감정과 느낌이 중요하므로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과 삽입된 곡들을 찾아보는 것 외에는 이 글들 속의 영화 이야기들은 어쩌면 내 기억처럼 왜곡되고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작은.
바로 이 영화다.
97년도 2월에 개봉한 이 영화를 명보극장 지금의 명보아트홀에서 친구와 함께 보았다.
아...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내 인생의 팔 할은 과장을 조금 많이 보태서 이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에 묻혀있다. 20대 초중반의 허세와 우울에 쩔어서(?) 명보극장, 서울극장, 피카디리 등등 이 동네 극장들을 줄기차게도 다녔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게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명보극장은 극장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현재는 공연을 올리는 아트홀 형태로 바뀌었다. 지금도 가끔씩 지나 다닐 때면 아련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는 친구를 꼬셔서 나간 길에 비가 엄청 내렸다. 겨울비였다. 게다가 약속만 했다 하면 조금씩 늦곤 하던 친구 대신 그날은 내가 영화표를 집에다가 두고 와서 다시 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모바일 티켓도 없을 때였고.... 아마 기억으로는 직접 가서 표를 구해다가 그날만 기다렸던 것 같다. 그 표를 두고 왔으니 미친 듯 집에 달려가 표를 가지고 다시 극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 시작한 후였다.
우리는 비에 쫄딱 젖은 생쥐꼴이었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좌석을 제대로 찾을 용기도 안나서 맨 뒤 좌석에 그대로 앉았다. 다행히 뒷좌석이 남아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서서 볼뻔했다. 이 영화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영화를 보기위해 우리가 빗속을 뛰어와서였다.
표를 두고 온 사실을 알고 집으로 다시 갔을 때부터 영화관에 들어올 때까지. 정말 미친 듯 뛰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뛰어본 적이 정말 가물가물하다. 차라리 영화를 포기했겠지(?);;;
영화 속 주인공 렌턴과 그 친구들도 뛴다. 미친 듯 뛴다.
Lust for Life 음악에 맞춰 뛰는 장면에 나오던 내레이션에 나도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있다. 인생을 선택하라로 시작하는 이 영상.. 차에 치이면서도 미친 녀석처럼 웃던 이완 맥그리어의 얼굴을 사랑했다. 이완 맥그리거의 데뷔작이었던가? 렌턴, 식보이, 스퍼드, 토미, 벡비.. 모두 약에 쩔어서 뒷골목을 누비는 일테면 루저들이었다.
이 찌질한 녀석들의 생활이 굉장히 감각적인 연출로 정말 좋은 음악들과 버무려져서 젊은이들이라면 꼭 봐야 할 영화였다. 영화는 내내 마치 약을 맞는 것처럼 짜릿하고 경이로웠다.
대니보일 감독의 처음 보는 이 무자비하게 빠르고 쿵쾅거리는 영화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대니보일 감독의 영화를 대체적으로 사랑하는 편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비치"때 잠시 실망한 적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적어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안다. 이 암울한 청춘들의 이야기가 꽃을 피운건 아마도 영화 못지 않은 음악 때문이었다.
이기팝의 "Lust for Life"
언더월드의 "Born Slippy"
루리드의 "Perfect Day" 등등....
정말 좋은 음악들이 많았다.
주인공 렌턴이 마약을 맞으며 바닥에 눕던 장면에서 나왔던가? 루리드의 퍼펙트데이와 화면의 아이러니가 참 인상 깊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다가 약을 빠뜨려 머나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던 렌턴의 모습을 정말 현실과는 다르게 환상적으로 묘사한 장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통용되는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나왔던 시절만 해도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주는 낭만이 있었나 보다. 나는 이 루저들을 사랑했었으니까.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고, 친구와 나는 누구랄 것 없이 한번 더! 를 외쳤다. 자리가 다 차지도 않았었고 그때는 지금처럼 직원들이 일일이 사람들 다 나갈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아서 영화를 계속 볼 수도 있었다. 친구와 나는 사람이 들어 오면 비켜줄 요량으로 앉았던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다. 다음 영화 시간까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영화는 다시 시작했고 극장에서 영화를 스트레이트로 두 번 본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97년도의 나는 렌턴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가? 그 생각을 하니 등골이 조금 서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