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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Oct 23. 2015

02. 늑대와 춤을

아빠와 춤을...

아빠와 딸

부모와 자녀 사이는 멀리서 보면 평행선이고 가까이서 보면 무수한 곡선이 요동을 치는 사이가 아닐까? 늘 양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어쩌면 부모와 자녀 사이일터. 그만큼 가깝고도 머언-

어렵고도 편안한 사이가 아닐까 싶다.


나는 불행히도 아빠와 친하지 못했다. 오히려 머리가 굵고 나서는 미워하기도 했는데, 아빠는 이기적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보통 60대 가장이 그렇듯 가족 안에서 중심을 못 잡고 따로 떨어진 섬처럼 지냈다.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던 아빠의 모습은 60대가 넘어서 참 작고 작아졌는데... 아빠와 친하지는 못했어도 추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이야 가족 예능프로그램만 봐도 딸바보들이 넘쳐나고 어떻게 서든 아이들과 추억을 쌓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준비된 아빠들이 많지만... 그 시절만 해도  먹고살기 바빴다. 특히 가난했던 우리 집은 더 그랬었다. 현실적인 엄마에 비해 아빠는 이룰 수 없는 것들만 바라보곤 했는데 그 점은 지나고 보니 내가 닮아 있다.


생각해보니, 주말의 명화를 즐겨 보던 아빠 옆에서 처음으로 알아듣지도 못할 외화들을 보기 시작했었다. 또 처음으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여 준 것도 아빠였다. 조금 더 크고 나서 동생은 아빠와 함께 다니지 않았는데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아빠와 단둘이 극장 가서 영화 봤던 기억이 어쩐일인지 강렬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였을 게다. 그 뒤로 아빠와 영화를 보러 단 둘이 나간 일은 없었으니까.


늑대와 춤을 포스터



아빠와 춤을

왜 이 영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가 우연히 신문을 보다 그랬는지. 내가 먼저 졸랐는지 모르겠다. 분명 한 건 계획에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는 거다. 91년 3월 개봉. 3월 말이라곤 해도 추웠던 기억이 난다. 뜻밖의 복병을 만났는데 극장들의 매진 행렬. -_- 그때 당시 인기를 끌던 영화를 무턱대고 보겠다고 나온 게 실수였다. 그 바람에 종로 일대 극장들을 헤맸던 것 같다.


그사이 내 손은 얼어붙었는데 아빠가 조용히 손을 잡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아빠와 손잡고 다닌 기억은 그때가 유일했는데 그 기억 하나가 지금껏 아빠와의 따뜻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추억 하나로 데면데면해진 지금도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끈이 되어주었다면 너무 오버스러운가?


말타고 달리는 존 덴버 중위의 모습


한참을 기다렸다가 어렵게 본 "늑대와 춤을"은 케빈 코스트너가 리즈 시절 때 찍은 영화로 이 영화 이후 한동안 잘생긴 남자 배우로  승승장구했더란다.

영화도 무척 재미있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존 덴버(케빈 코스트너) 중위가 우연히 만난 인디언 부족과 동화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있었는데 영화 제목인 "늑대와 춤을"은 늑대와 어울리는 존 덴버를 보고 인디언 부족이 지어준 인디언식 이름이었다. 그 이름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주먹 쥐고 일어서"였다. 존 덴버와 사랑에 빠지는 백인 출신 인디언 부족 여성의 이름이었는데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얼마 동안은 이 인디언식 이름 짓기가 유행이었다.

'늑대와 춤을'과 '주먹쥐고 일어서'
늑대와 친해지려는 존 덴버 중위


내 인디언식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히 작명하고 혼자 좋아했던 기억이 있는데...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이 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기억은 그렇게 추억으로 남고

추억은 살아가는데 버틸 수 있는 힘으로 남는다.


아빠를 부탁해, 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족 간에 공유할 무엇 하나 없다면....

지금 당장, 영화라도 보러 가보자.




덧붙이기

꿈도 야무졌지. 일주일에 한 편의 영화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물 건너 가버렸다. 브런치의 묘미는 서랍에 두고두고 묵혔다 쓰는 맛이라고 해두자.


개인적으로 시작하고 벌린 일들은 많았지만... 용두사미처럼 사그라져버렸다. 내 스스로가 정리가 안되고 하기 싫으니 이것저것 핑계만 대다가 하나 둘 꼬리 자르기 하고 있는 날들이다. 무언가 정리가 되다 보면 브런치도 엉덩이 붙이고 느긋하게 쓰는 날이 오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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