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볼파란 Aug 14. 2016

09. 어바웃 어 보이

모든 사람은 섬이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섬이다
게다가 현대는 독신으로 살기에 적당한 시대다
바야흐로 섬의 시대다
난 나 자신도 바로 그런 섬이라고 생각한다



윌(휴 그랜트)이 퀴즈쇼를 보며 하는 독백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자신이 섬이라고 생각하며 철저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 백수 윌이 어른 주인공이다. 윌의 삶은 그야말로 단순하다. 그도 그럴 것이 윌은 일해 본 적이 없다. 뭐, 고쳐 말하자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만하다는 뜻이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작곡한 단 한곡이 대박을 쳐서 그 음원 저작권료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단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시즌 때면 흘러나오는 단골 캐럴송이다. 윌은 그 노래를 끔찍이 싫어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래 때문에 일을 안 해도 된다. 


윌은 바람둥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말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관계만을 선호한다. 그의 지론대로라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일이다. 


나는 혼자서 잘 살고 있어요.
나밖에 모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없는 거예요.


대부가 되어 달라는 친구의 말에 질색하는 윌

내가 이 영활 처음 봤을 땐 마커스(니콜라스 홀트)에 몰입해서 봤다. 최근에 다시 보게 된 이 영화는 달리 보이더라. 모든 영화와 책은 언제 보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것이 다를 수 있다. 그걸 받아들이는 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인간관계에 지쳤기 때문인지 윌에게 몰입하게 됐다. 


나 역시 윌처럼 먹고사는데 문제없기만 한다면 일할 생각이 없다. 한량처럼 보이지만 윌은 시간을 단위로 쪼개서 쓰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따지고 보면 마커스가 끼어들어 그걸 망치는 셈이다. 모든 인간은 섬이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나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 영화는 지금의 내겐 그래서 관계에 관한 질문을 하는 영화였다. 사람과 사람은 어떤 관계인지, 자식과 부모는 어떤 관계인지 말이다. 


새로 전학 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커스
인생을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난 그런 부류가 아니란 걸 깨닫기 시작했다
난 적응을 못했다


마커스는 엄마와 단 둘이 산다. 엄마 피오나는 심한 우울증 환자다. 아침이면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자살을 기도한다. 아들 마커스는 어려서부터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는 엄마를 생각해야 한다. 엄마와 단 둘 뿐이란 사실이 두렵다. 숫자 2보다는 3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때 마커스 눈에 띈 인물이 윌이다. 


윌이 뒤탈 없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름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아이를 둔 홀 엄마들이다. 그 엄마들을 만나기 위해 한부모 모임에 참석한 윌. 심지어 가상의 아들 네드까지 만들어 낸다.

한부모 모임에서 만난 수지를 통해 알게 된 마커스. 마커스의 엄마 피오나와 수지는 친구사이다. 마커스와 윌이 꼬이게 된 건 어쩌면 이 공원 오리 살인사건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ㅎㅎㅎ

마커스가 불안한 엄마를 위해 선택한 사람은 윌이다. 윌이라면 엄마와 좋은 짝이 되어 완벽한 셋이 될 거라 믿는다. 하지만 남녀 간에는 서로 통해야 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법. 윌과 피오나는 서로 전혀 관심이 없다.

윌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마커스는 윌에게 네드라는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윌을 찾아가 아이가 없지 않냐며 오히려 귀여운 협박을 하기 시작한 마커스. 

이때만 해도 귀여운 소년이었는데 서양 아이들이란 워낙 폭풍성장을 하는지라 이후 이 소년은 190센티에 가까운 멋진 청년으로 자라게 된다. 

스킨스, 엑스맨 시리즈, 매드 맥스, 웜 바디스 등...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훈훈하게 잘 자라주었다. 원래 남의 집 아이들은 빨리도 자란다지만... 하... 시간 참.

그 뒤로 계속 자신을 찾아와 함께 퀴즈쇼를 보고 돌아가는 마커스가 귀찮기만 한 윌.

하지만 어린 왕자와 여우사이가 그랬듯, 누군가와 함께 매일 정해진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삶 속에 들어가는 일이다.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고 서로를 기다리게 되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진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의미다. 

괴롭지 않은 날이 없어서 
매일 여기에 오는 거다
내 두려움이 한심한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커스와 윌은 나이를 초월해 서로를 위로해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은 혼자지만 혼자여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걸 어쩌면 둘은 서로를 통해 알게 된 게 아닌가. 살아가는 게 괴롭기 때문에 작은 소통만으로도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었구나 하는 위로를 받는다. 


윌은 마커스를 냉정하게 대하기도 하지만 마커스가 자신에게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모두 마커스 탓이다
한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니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 윌
이젠 가벼운 만남이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마커스는 엄마를 위해 교내 락콘서트에 선다.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될 마커스를 위해 윌은 킬링미소프트리를 마커스와 함께 부른다.

이때 가구의 색상과 윌이 입고 있는 의상이 모두 완벽해서 한 장. 휴 그랜트는 실제로도 윌과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토크쇼에서 일부다처제를 지지한다며 결혼 유지의 비법이 불륜이라 한걸 보면.


모든 사람은 섬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부의 섬들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섬들은 바다 밑에선
서로 연결돼 있다



휴 그랜트야 여전히 혼자 섬이라 믿고 있을지 몰라도 윌은 마커스를 만나고 변한다. 본인이 섬이라는 걸 여전히 믿지만 일부의 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출근하는 길에 서울역 환승통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면 나는 숨이 막힌다. 뒤돌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턱 하고 막힌다. 매일매일 우는 심정으로 사람들과 섞여 지내다 보면 정말 간절히 혼자가 되고 싶길 바란다. 하지만 이 세상에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또 없다. 혼자이길 바라는 건 사실 지쳐서이지 그 어느 누구도 정말 혼자이길 바라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섬들이 바다 밑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윌의 깊은 깨달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섬이다. 그렇지만 섬끼리 다리를 놓을 수도 있고 배가 다닐 수도 있고 그러다가 다시 섬이 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8. 더 랍스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