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고전 명제다.
이 영화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이 명제를 풀어낸다.
당신 인생을 망친 자를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절대 안 걸린다고 보장한다면 죽이겠습니까?
요원 하나가 폭파범을 막다가 사고로 크게 얼굴을 다친다. 다친 얼굴은 이식 수술을 통해 낯선 얼굴로 변하게 된다. 알고 보니 이들은 타임머신 여행을 통해 피즐범이라 불리는 폭파범을 막으려는 비밀 요원이었다.
요원은 새로운 얼굴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한 바에서 바텐더로 위장하여 존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존은 제인이라 불리던 소녀시절에서 어떻게 남자로 변하게 되었는지 자신의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까지 봤을 때, 이미 영화는 반 가까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내가 생각했던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절대 어떤 후기도, 정보도 보지 말고 무조건 보라는 말에 정말 아무것도 안 보고 봤던 터라 이런 진행이 당황스러웠다.
아니, 고작 바에서 술 마시면서 존의 옛날이야기만 주야장천 진행되는데 제인 시절 회상 장면들은 이 영화가 대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거 타임머신 얘기 아니었어? 폭파범을 잡기 위한 액션 영화 아니었어?)
다만 존이라는 남자 역할을 한 사라 스누크는 대단했다. 좀 피곤한 젊은 시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떠올리게 하는 미남자로 나와 처음엔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저 남자 배우 누구지? 싶었는데 여자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모습뿐 아니라 목소리와 말투 역시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처음엔 정말 몰랐다.
우리의 첫 임무는 마지막 임무만큼 중요해 임무를 완수할 때마다 종착지가 가까워지지.
스포일러 때문에 더 얘기할 수 없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선, 신화 속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가 생각났다. (영화 글에는 대부분 결말을 비롯한 감상글을 적게 되지만 이 영화는 스포뿐만 아니라 어떤 글도 읽지 말고 보라고 하고 싶다.)
'첫 임무는 마지막 임무만큼 중요하다는 말' 역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알 수 있다. 종착지까지 가까워지면 머리를 한 대 띵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원제는 숙명(Predestination)이지만 '타임 패러독스'라는 제목은 잘 지어진 거 같다. 어쩌지 못한 채 숙명처럼 시간의 패러독스에 갇혀 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스터에 속지 말자. 특히 온갖 문구들로 때려 박은 한국판 포스터는 최악이다.
3번의 반전이라는 둥, 모든 반전을 비웃어라 등의 문구는 대체 왜 넣은 것인가. 반전이 있다고 하는 순간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무슨 반전인지 찾는 데 혈안이 되는 것 아닌가.
전혀 색다른 타임머신 영화를 보고 싶다면, 여운이 긴 영화를 보고 싶다면 추천한다.
굉장히 쓸쓸해진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고 난 후의 쓸쓸함과 같다.
원래 인간 삶의 굴레가 그래, 숙명처럼 어쩌지 못하고 쓸쓸하게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거지.
처음이 나중 되고, 나중은 처음이 되고. 달걀이 먼저든 닭이 먼저든 알게 뭐야.
당신 인생을 망친 자를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절대 안 걸린다고 보장한다면 죽이겠습니까?
아니,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일 수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