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좀 잡으면 안 돼요?"
"안 돼요. 약속했잖아요."
단호하게 말하는 은영을 바라보는 재혁의 눈이 일 그러졌다. 그래, 그 망할 놈의 약속. 그 약속이 여지까지 유효한 건지 몰랐지. 아니, 연애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공중에 흩날려버릴 꽃가루 같은 건 줄 알았다.
연애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다 되어 가건만 재혁은 은영의 손은커녕 손톱 하나 붙잡아 본 적이 없다. 손 한 번 못 잡아봤다고 하면 짖꿎은 친구 녀석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키스는?', '다른 진도는 못 뺐어?'라고 킬킬거리기 일쑤였다. 친구들의 입방에 오르내리기 싫어 '몰라. 그걸 왜 알고 싶어.'라고 퉁박을 주고 말았지만 사실 손만 안 잡았지, 할 거 다 해봤다.
그러니 오히려 애가 탔다. 다른 건 허락하면서도 손은 허락하지 않는 그 단호함이 서운했고 대체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말했잖아요. 전 남친이 제 손 잡아보고 찼다고."
"그게 말이 돼요? 손이 거칠다고, 여자 손 같지 않다고 찼다는 게?"
은영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되돌이표였다. 손이 거칠다고 이별을 통보했다는 전 남친도 이해가 안 됐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손을 잡는 걸 허락하지 않는 은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애하기 전 썸을 탈 때만 해도 절대 손을 잡지 않겠다는 은영의 말에 그게 대수인가 싶어 알겠다고, 싫으면 잡지 않겠다고 덜컥 약속 아닌 약속을 한 게 이때까지 이어져 올 줄이야.
은영의 손은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하얀 피부에 일을 해보지 않아서 마디조차 잡히지 않은 길쭉한 손가락은 누가 봐도 섬섬옥수였다. 재혁은 연애를 시작하며 꾸준하게 손을 잡으려고 시도했다. 대놓고 잡지 못하니 식당에 가서 앉아 수저를 건넬 때 슬쩍, 걷다가 팔이 부딪히면 슬쩍,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잡는다는 명목으로 슬쩍. 하지만 운동신경이 없는 은영은 손에 있어서만큼은 빛보다 빨랐다. 그때마다 번번이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재혁은 그저 눈앞에 맛있는 간식을 두고도 먹지 못하는 강아지처럼 안달복달할 뿐이었다.
오늘만 해도 영화관에서 팝콘을 입에 넣어주고 은근슬쩍 밑으로 손을 내려 잡으려 했지만 매섭게 손을 내리치고 뿌리쳤던 것이다. 재혁도 사람인지라 꾸준하게 저를 밀어내는 은영에게 뿔이 난 상태였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영화 내용은 이미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 와서 서운한 마음을 털어놓자 은영은 대뜸 약속을 운운하며 오히려 그런 재혁을 나무랐다.
"나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손이 거칠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은영 씨, 손을 잡고 싶은 건데."
"난 싫어요. 내가 싫다고 했잖아요. 싫으면 안 하겠다고 했잖아요. 왜 이제 와서 손에 목숨을 걸어요?"
"아니, 손에 목숨을 거는 게 아니라 좋아하면 당연히 닿고 싶고... 연인끼리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게 손이잖아요. 손 좀 잡아보고 싶은 게 목숨까지 걸 일이에요?"
"내가 다른 스킨십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왜 손을 잡으려고 해요? 좀 징그럽잖아요..."
"에? 징그러워요? 손을 잡는 게? 아니, 무슨... 사람을 변태를 만드네."
은영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
'젠장.'
당장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달래줘야 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손 좀 잡으려고 했다고 징그럽다고 정색을 하는 은영이 이 순간만큼은 미웠다.
사람 손이 거칠면 얼마나 거칠겠는가, 아니 사포처럼 거칠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저렇게까지 화를 내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쯤 되니 손이 거칠다고 차버렸다는 전 남자 친구에 대한 화가 꾸역꾸역 올라왔다. 어떤 미친 새끼가 여자 친구 손이 거치네 마네 하면서 헤어지자고 했단 말인가. 아니 근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난데. 왜 나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모든 남자가 여자 손이 부드럽기를 바라는 건 아닌데 말이다. 물론 살결이 부드럽고 매끈하면 좋겠지. 근데 그건 정말로 사소한 문제이다.
제 친구 중에는 여자가 겨드랑이 털이나 팔다리에 털이 많으면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하던 녀석도 있지만 재혁은 굳이 따지자면 상관없는 쪽이었다. 처음 만나서야 당연히 외형에 시선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점들이 눈에 더 들어오게 마련이다.
아, 생각해 보니 전 남친은 어쨌든 은영의 손을 잡아봤다는 거잖아. 여기까지 떠올린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해선 안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평소라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갔겠지만 이미 은영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 전 남친은 되고 자신은 안된다는 것에만 꽂혔다.
"그리고 왜 나만 안 돼요? 전 남친은 잡아봤다는 거잖아요. 나랑 그 새... 아니 그 사람이랑 같을지 어떻게 알아요? 나 못 믿어요?"
재혁의 말을 들은 은영의 눈가에 경악스러움이 묻어났다. 가득 차오른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여기서 전 남친 얘기가 왜 나와요? 재혁 씨, 이런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떤데요?"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 알았으면? 안 만났을 거란 얘기예요?"
"......"
"그래서 나 만난 거 후회해요?"
"......"
재혁은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머리를 쳐서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입으로 나오는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동안 은영에게 보여줬던 모습과 달리 재혁은 사실 성격이 급하고 감정적이었다. 하지만 은영은 재혁과 달랐다. 화가 나면 오히려 피가 차갑게 식는 편이었다.
자신이 싫다고 했던 일을 굳이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재혁의 모습을 보니 실망스러웠다. 전 남친 얘기를 한 건 자신의 오판이었다. 새로 만난 연인에게 과거에 만났던 사람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손을 잡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전 남친이 아니라 전전 남친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은영의 외모에 관심이 많았다. 너는 긴 머리가 잘 어울린다거나 그 색상보다는 이 색상의 옷이 더 잘 어울린다고 했을 때만 해도 자신에게 그만큼 관심과 애정이 커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밖에서 스킨십은 많지 않았지만 보통의 연인들처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녔다.
남자 친구는 여자 손이 너무 거칠다, 핸드크림을 듬뿍 바르라는 말을 곧잘 했다. 은영의 손, 특히 손바닥은 건조하고 거친 편이었다. 아무리 핸드크림을 발라도 소용없었다. 메마른 땅처럼 어떤 크림이든 흡수할 뿐 촉촉하게는 해주지 못했다.
남자 친구의 외모 지적은 갈수록 심해졌다. 얘기도 없이 머리를 자르고 왔을 때는 화를 냈고 자신을 만날 때 입고 나오라며 불편한 옷들만 잔뜩 사줬다. 사귄 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 남자 친구는 차 안에서 가만히 은영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은영아, 여자 손이 이게 뭐야. 네가 만지면 무슨 나무껍질이 만지는 것 같아. 거칠거칠. 여자가 아니라... 이건 마치... 우리 그만 만나자.'
은영은 손 이야기를 하며 이별을 고하는 남친에게 하마터면 손이 부드러운 여자를 만나게 된 것이냐고 물을 뻔했다. 남친과 헤어지며 은영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거친 손이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 뒤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것에 민감해졌고 손에 대한 콤플렉스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이어졌다.
재혁과 만나기 전에 잠시 만났던 또 다른 남친은 무심한 사람이었다. 은영의 외모 콤플렉스가 극에 다다랐을 때 만났기 때문에 그런 은영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손을 잡지 않는 것에는 쿨하게 넘겼지만 수시로 뭐가 더 어울리냐며 물어오는 은영에게 지쳐나가떨어졌다.
'넌 좀 너를 사랑할 필요가 있어.'
또 다른 남친은 헤어질 때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그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은영은 자신을 사랑하는 게 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우연히 소개로 만난 재혁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은영의 말을 잘 들어줬고 굳이 전 남친 얘기를 꺼내며 자신의 손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도 공감하며 이해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서 변태 취급한다며 씩씩대고 앉아 있는 남자는 전혀 다른 남자 같았다. 자신이 좋아했던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매번 제 손을 잡고 싶어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수시로 슬쩍 손을 잡으려고 시도하는 재혁을 보며 이번에야말로 저 손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은영의 눈이 재혁에게 향했다. 정작 만난 거 후회하느냐고 물었던 재혁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자아..."
은영이 별안간 두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은영의 행동이 뭘 뜻하는지 미처 알지 못하는 재혁의 눈이 커졌다.
"잡아요. 잡고 싶어 했잖아요."
재혁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이건 마치 테스트 같았다. 반신반인이었던 헤라클레스가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12가지 과업처럼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않고는 은영의 애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눈앞에 그토록 원하던 손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을 끼워 넣어 꽉 움켜쥐고 싶었다. 하지만 서운함을 토로하던 것과 달리 재혁은 그 손 앞에 주춤거렸다.
"화났어요?"
"......"
은영의 눈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재혁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재혁은 할 수 없이 은영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커다란 손이 이내 은영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은영의 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 재혁이 지금까지 잡아봤던 어떤 여자의 손보다 거칠었다. 심지어 남자들 손보다 더 거친 것 같았다. 나무껍질 같기도, 때 밀 때 쓰는 이태리타월 같기도 했다.
"... 때밀이 수건 같아요."
솔직한 감상에 은영의 눈이 가로로 길게 길어져 재혁을 노려봤다.
"차라리 오래된 고목 같다고 해줘요."
"그럼 난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로 할래요."
어이 없는 재혁의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시끄럽겠네요."
"앞으로 딱 붙어서 은영은영은영은영-하고 울게요."
"미쳤나 봐."
재혁이 긴장이 풀렸는지 씩 웃어 보였다. 은영이 손을 빼내려고 하자 재혁이 냉큼 손깍지를 껴서 잡아챘다.
"이제 안 놔요."
"계속 잡고 싶어요? 느낌 별로일 텐데?"
"내가 잡고 싶었던 건 다른 누구의 손이 아니라 은영 씨 손이잖아요. 잡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는데 놓을 수야 없죠."
재혁의 말에 은영은 그제야 제 손이 때밀이 수건이든 오래된 고목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
* 이런 알콩달콩한 결말은 아니었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나봐요. 놀랍게도 실화가 어느 정도 섞여 있답니다. :) 거친 손 사람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