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일대 일 가르마의 단발머리였다.
'정대만이야, 뭐야.'
이게 그 남자의 첫인상이었다. 채도 낮은 반팔 티셔츠와 면바지. 어깨에 메는 크로스 백. 운동은 따로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골격 자체가 타고나서 어깨가 넓었다.
남자는 출근길에 자주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정대만'이라는 감상은 곧 희미해져 배경 속으로 사라질 뻔했지만 남자를 기억하게 된 건 매일마다 같은 시간에 비슷한 장소에서 스쳐 지나간다는 사실과 몇 번인가 눈이 마주쳐 서로를 의식하게 된 것 때문이었다.
마주 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 어색해지는 게 싫어 내 시선은 늘 타인 사이의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거나 무의미하게 들여다보는 핸드폰 액정, 그리고 땅바닥의 어딘가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면 걸어오는 상대방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는데, 남자는 꼭 나와 눈이 마주쳤다.
8시 33분쯤, 우리는 늘 노란색 건물의 유치원 앞에서 지나쳐갔다. 매일 같이 같은 시간에 오는 걸 보면 성실한 남자였다. 유치원 보다 먼저 있는 정육점을 지나갈 때면 이미 저만치 앞에서 남자가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고 남자만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늘 같은 시간 대에 출근하는 매일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마련이고 그들의 인상착의나 얼굴을 기억하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내가 남자를 꼭 집어 기억하고 의식하게 된 건 그러니까 매일마다 마주쳐서가 아니라 '호감' 때문이었다.
하필 난 슬램덩크의 '정대만'을 가장 좋아했고 남자의 외형은 정대만과 비슷해 보였다. 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은 내 멋대로 실제 성격도 정대만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충분했다. 남자 또한 날 의식하고 있다고 알게 된 건 눈이 마주칠 때면 얼른 고개를 돌려버린다던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들어 무의미한 스크롤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았고 서로를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나는 어색해져 버렸다. 손발이 로봇처럼 어색하게 걷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라리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간은 일부러 더 일찍 가거나 늦게 갔지만 만나는 시간 대와 장소만 달라졌을 뿐, 우리는 끊임없이 마주쳤다.
그도 그럴 게 버스 정류장에서 회사는 직진 코스로 15분을 걸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좁고 긴 2차선 골목길을 하염없이 걸어야 했기 때문에 몇십 분 늦거나 일찍 간다고 해서 남자를 피할 수 없었다. 남자 역시 그 긴 골목길을 끝없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정반대의 시작점에서 걸어와 지나쳐갔다.
그 뒤 나도 모르게 출근할 때 복장을 신경 쓰거나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뛰쳐나오면서 고데기로 머리카락을 마느라 여념이 없거나 화장을 공들여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에 어이가 없어 '미친...'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설렘'을 인정하고 나니 출근길이 즐거워졌다. 가끔 남자를 못 만나는 날도 있었다.
'어디 아픈가?', '쉬는 날인가'
아쉬웠다. 혹시 내 쉬는 날에도 남자는 아쉬워할까. 그렇다고 남자한테 말을 걸거나 연락처 따위를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결과 값이 늘 좋기만 한 건 아니다. 행동하지 않아서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는 '평화'롭다. 잔잔한 물가에 굳이 돌을 던져 개구리를 깨울 필요가 있을까.
예전 직장에서 나는 그 짝사랑의 비극적인 결말을 눈앞에서 목도하였던 적이 있었다. 직장 앞 카페에 잘생긴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근무하고 있었다. 알바생을 보러 가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직장 동료였다. 꽤나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그이는 단골이라는 명분으로 말을 걸고 안면을 텄다.
알바생은 친절했다. 근사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입꼬리가 올라가면 주위가 조금 더 밝아지는 것 같은 효과가 있었다. 비극의 시초는 그 미소가 나한테만 지어주는 거라는 착각. 나한테만 친절하고, 나한테만 서비스를 주고, 나한테만 말을 걸어줄 거라는 착각. 착각은 곧 내가 그 사람에게 특별할 거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행복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알바생은 알바를 그만둔다고 했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직장 동료는 과감하게 데이트를 신청했었다. 그동안 고마웠다며(커피를 사준 건 직장 동료인데 뭐가 고맙단 건지.) 밥이나 한 끼 하고 싶다는 말을 건넸고 그날 옆에 있었던 나는 그 말을 듣던 그 알바생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비즈니스적인 미소와 함께 당혹스러움이 떠올랐고, 이런 일은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듯 순식간에 가면을 뒤집어쓰고 고맙지만 안 될 것 같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직장 동료의 얼굴이 흙색으로 변했다. 직장 동료에게 주위를 환하게 밝혔던 알바생의 미소는 어느샌가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니는 '끼'로 바뀌어버렸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라는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짝사랑의 이점이야말로 경제적이고 감정의 소모가 덜하다는 것 아닌가. 혹자는 감정의 소모가 더한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건 하수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짝사랑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완벽해진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
정대만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완벽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내 짝사랑의 결말 역시 비극적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연일 폭염으로 힘들게 한 날씨는 여름을 몰아내며 한바탕 소나기를 뿌렸다. 갖고 다니는 우양산을 펼쳐봐도 갑작스럽게 내리는 소나기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몸은 금세 젖어들었다. 덥고 습한 기운에 절로 얼굴이 찌푸러들었다.
8시 33분. 노란색 유치원 앞. 평소라면 이미 정대만과 스쳐 지나갔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쉬는 날인가. 강한 바람까지 불어 우산을 앞으로 세우며 힘겹게 나아가던 그때, 살짝 치켜든 우산 너머로 남자가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 항상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습하고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까지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얼굴이었나. 하지만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의 우산 아래 웬 여자와 함께였다. 앳되고 귀엽게 생긴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강한 비바람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흔들려 보이지 않았다.
정대만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여자친구가 있거나 혹은 일찍 결혼해서 와이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남자에게 설레어 의식하며 지나쳐 다녔던 그동안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수치스러워졌다.
행동하지 않았으니 도출할 결괏값은 없었다. 누구도 상처 주거나 받은 사람은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며 과감하게 데이트를 신청하던 직장 동료처럼 얼굴을 붉힐 필요도 없었으나 내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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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만, 출근길에 오래 걷는 것은 사실입니다. 걷다 보면 익숙한 얼굴들도 보이고 매번 같은 장소에서 지나쳐가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고 설레는 기분이 든 적이 아주 오래전 같아서 써봅니다. 뒤에 이야기가 사실 더 있지만 뒷심이 부족해서요.;; 정대만 같은 사람을 출근길에 마주쳐보고 싶네요. 저도 불꽃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제목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 패러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