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北海道) 여행 02
아무리 생각해도 노숙은 아니었다. 나를 흘깃거리며 쳐다보는 중국인들 무리 속에서 다시 내려왔다. 이미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여기서 자지 않는다면 당장 시내로 가야 했다. 삿포로로 가기 위해 자동판매기에서 표를 뽑았다. 그 밤에도 친절하게 가르쳐준 젊은 안내원 고마워요! 삿포로 가는 기차에 급하게 몸을 실었다.
거의 밤 11시가 되어야 도착한다. 그 와중에도 예약석을 끊어서 내가 앉는 칸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외국인은 나 혼자인 듯 그것도 죄다 남자들이다. 내 앞에 앉은 아저씨는 조폭 두목처럼 생겼다. 사진에서 보이는 머리통.;;; 그냥 입석에서 갈걸. 지금은 어차피 사람들도 없어서 앉아서 갈 수 있는데...
약간 쫄아서 핸드폰을 꺼내어 야경도 찍어본다. 볼 것도 없다. 이게 홋카이도 첫인상이다.
こんばんは~ ほっかいどう!
삿포로로 넘어가는 짧은 사이 서둘러서 부킹닷컴 어플을 켠다. 삿포로에서 당장 묵을 숙소가 필요했다. 자세히 살펴볼 여유도 없다. 오늘 밤 당장 묵을 데가 필요했다. 한국에선 비싸서 패스한 '삿포로 그랜드 호텔'을 예약했다. 역에서 가까운 곳 중에서 눈에 띄는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19,000엔. 20만 원 돈이다.
역에 도착해서 바로 택시 타러 갔다. (이날 이후로 나는 홋카이도에서 택시 애용자가 되고 만다. 아이 러브 택시!) 일본에서 처음 타보는 택시였다. 몇 번이나 일본에 왔었지만 택시 탈 엄두도 안 냈었다. 하지만 비상상황. 택시 정류장에서 서있으면 가운데 모여있는 택시기사들이 순서대로 질서 정연하게 와서 세운다. 절대 한꺼번에 오지 않으며 한두 대씩 만 와서 직접 내려 손님들 짐을 손수 옮겨주고 손님을 정중하게 태우고 나면 그다음 택시가 와서 세운다. 게다가 일본 택시는 손수 문을 열지 않아도 된다.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시스템. 놀라운 것은 택시 기사들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다른 지역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택시들을 탔지만 젊은 기사를 만난 적은 없다. 노년을 위한 특별 고용정책인가? 우리나라에서라면 노인들의 운전 솜씨에 대해서 믿지 못할 텐데 이곳 기사님들은 그야말로 빙판길을 날아다닌다. 직접 타고서는 못 느끼지만 거리에서 걸어 다니면서 빙판길에 슉슉~ 미끄러져 가는 택시들을 보면 놀라울 뿐이다. 저렇게 미끄러지면서 사고 한번 안 나다니!
다만 한 가지, 내 무거운 캐리어를 노인분들이 직접 들어서 트렁크에 넣는 모습은 좌불안석이다. 같이 들려고 해도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면서 끙끙댄다. 예약한 호텔은 역시 역에서 멀지 않았다. 그날 호텔엔 사람이 많지 않았는지 그 밤에 체크인했는데 고층의 패밀리룸으로 업그레이드해줬다. 나 혼자 체크인했는데 침대만 4개인 넓고 큰 패밀리 룸이다. 하하핫.
침대에 널브러져 있고 싶지만 야경 때문에 창문에 바짝 붙어서 시내 전경을 바라본다. 그렇게 힘들게 오니 그래도 첫날부터 야경은 끝내주는군! 눈 내린 거리에 차들이 띄엄띄엄 다닌다. 그리고 보니 눈도 처음 제대로 본다. 삿포로에는 역시 눈이구나. 눈을 처음 본 사람처럼 바라본다. 이 눈 때문에 고생할 게 아직 더 남아있는 것도 모른 채. 한참 야경을 보고 나서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씻지도 않고 자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배가 고프다. 잠시 누워서 그대로 잘 것인지 나가서 뭐라도 사 올 것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대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요깃거리보다는 당장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삿포로 클래식. 목구멍으로 넘겨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그대로 나선다.
나가서 직접 걸어보니 그야말로 다 빙판이다. 노페 패딩 부츠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이렇게 죄다 빙판일 줄 몰랐다. 엄마를 데려오지 않기를 천만다행이었다. 그래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의 밤공기는 춥다기 보다 상쾌하다. 아! 이 얼마 만에 마셔보는 시원한 공기인가. 길 건너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 왔다.
맥주와 라면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삿포로 클래식은 맛있다. 목넘김이 좋더라. 아주 특별한 맛은 못 느꼈지만 이후로도 홋카이도에서만 마실 수 있는 맥주라는 생각에 수시로 마셔주었다. 1일 1맥주.
라면을 먹으면서 비행기에서 보다가 만 '칠드런 오브 맨'을 마저 보았다. 이 기적의 세기말적 영화를 자정이 훌쩍 넘어 새벽이 다 되어 가는 홋카이도 첫날밤에 보려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한 밤이 마치 영화 속 세상의 끝 같았다. 눈은 천근만근인데 정신이 맑았다.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아주 길고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