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北海道) 여행 03
늦잠을 자고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서 느긋하게 나왔다. 역이 가까운 편이지만 빙판길인 도로를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갈 엄두가 안 나서 기본요금에 택시를 타고 역으로 왔다. 오늘은 첫날에 못 넘어간 하코다테에 넘어가야 한다. 아직 홋카이도 레일패스를 사지 않았으므로 삿포로역에서 사야 한다. 내가 사야 할 패스는 7일권으로 2,4000엔이다. 얼핏 비싼 것 같지만 나처럼 하코다테나 아바시리를 왕복으로 다녀올 사람이면 무조건 패스를 사야 한다. 본전은 뽑고도 남는다. 일본은 교통비가 엄청 비싼 편이다. JR패스는 JR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사면되고 지정석도 함께 예약할 수 있다. 지정석 예약은 미도리 마구치 등에서도 할 수 있다.
http://www2.jrhokkaido.co.jp/global/korean/index.html
↑JR레일패스는 친절하게 한국어 홈페이지가 있다.
나는 지난밤 잠들기 전에 미리 지정석 예약을 하기 위해 여행코스별 지정석 날짜와 시간을 적어두었다. 첫날부터 일정이 틀어진 걸 보면 미리 지정석을 구매해두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패스만 있으면 지정석 예약은 무료이니 틀어지면 안 쓰면 그만이다. 패스로는 자유석을 마음대로 탈 수 있지만 나는 맘 편하게 지정석을 다 예매하기로 했다. 공항역에서라면 지정석 예약을 미리 할 수 없지만 삿포로역에서라면 전 일정 모두를 다 할 수 있다. 패스를 끊는 것은 순조로웠다. 친절한 직원은 꼼꼼하게 하나하나 시간을 확인하며 지정석 모두 끊어주었다. 굳이 보태서 말하지 않아도 하코다테나 오타루를 갈 때는 알아서 좋은 좌석(바다가 보이는 좌석)으로 끊어준다. 나중에 알았지만 모두 끊어준 건 아니었다. 오타루에서 삿포로 오는 지정석은 빼먹어서 오타루 역에서 다시 끊었다. 삿포로에서 오타루 가는 시간을 바꾸는 바람에 오타루에서 삿포로 오는 것은 지나친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다닐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극성수기 때 빼고는 지정석 챙기기 힘들다면 (물론 장거리는 꼭 지정석으로 끊어서 가야 한다) 가까운 곳은 JR패스로 자유석에서 자리를 잘 찾아서 앉아 가면 그만이다. 너무 친절한 직원 덕분에 어젯밤 일이 보상받는 듯하다. 시간이 남아 캐리어를 락커룸에 보관하고 삿포로역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에끼벤과 간식거리를 샀다. 삿포로역은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꽤 크다. 간식거리 살 곳도 많고 기념품을 살 곳도 많다.
플랫폼에 들어서니 기차 레일에 눈이 잔뜩 쌓여있다. 정차해 있는 기차들은 저마다 눈이 쌓여 얼어붙어 있다. 얼음이 녹아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많은 눈을 헤치고 왔을까. 눈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실감이 난다. 하코다테까지는 4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간이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에끼벤을 먹기 시작했다.
북해도 우유는 고소하고 담백하다. 생우유를 잘 안 마시는 나도 여행 내내 두어 번 사 마셨다. 첫 에키벤은 유명하다는 카니산슈아지쿠라베 벤또를 샀다. 만원이 훌쩍 넘지만 한 번쯤 사 먹어도 괜찮다. 세 가지 종류의 맛살을 음미해 보았지만 미각이 살아 있지 못한 지 그 맛이 확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맛살이 약간씩 다르게 느껴질 뿐. 달고 짭쪼름하니 맛있게 먹었다. 역시 단짠은 진리다. 남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먹었지만 양이 꽤 많다.
기차가 달리고 풍경은 눈. 눈. 눈이다. 어딜 가도 무섭게 쌓여있는 눈을 볼 수 있다. 처음 보는 눈이 아닌데 정신없이 눈을 봤다. 지붕 위에 창문까지 하얗게 쌓여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나와있는 사람들도 없는 마을을 지나고 나니 바다가 나온다.
하늘은 낮고 어둡게 깔려있다.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눈이 내린 벌판 끝에 새파란 바다가 놓여 있다. 어둡고 흐린 날 때문인지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기차는 바다와 맞닿아서 바로 옆을 달린다.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는 하늘과 다르지 않았다. 하늘과 같은 색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놨다. 마치 어딘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속절없이 카메라만 붙들고 창문에 붙어 있었다.
오후 4시가 다 되어 하코다테역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와 연휴는 이미 지났는데 아직도 역 앞은 반짝반짝 조명이 켜져 있다. 삿포로역보다는 작지만 훨씬 더 정겹다. 호텔은 역 앞이다. 역 앞이라고는 해도 역시 빙판길을 걸어가야 한다. 게다가 이곳은 빙판이 녹아서 질척거린다. 호텔이 너무 가깝게 표기되어 있어서 걸어가기로 한다. 역시 힘들다. 끌리지가 않으니 두 손을 안간힘을 쓰며 끌고 가야 한다.
머물게 된 곳은 뉴오테 호텔이다. 아침 시장 바로 앞이다. 내일 아침 일어나 아침 시장에 가서 카이센동을 먹을 작정이다. 원래대로라면 하코다테에서 2박을 하며 하코다테 츠타야 서점을 들러보려고 했지만 1박을 날리고 저녁이 다 되어 도착한 데다가 내일 오전에 떠날 예정이므로 결국 하코다테에서 야경만 즐기고 가게 된 셈이었다.
일정이 틀어지면서 4시간이나 걸리는 하코다테를 갈까 말까를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온 길이었다. 어차피 여행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으므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아... 하지만 하코다테에 오지 않았던 것이 좋지 않았을까? 내게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