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北海道) 여행 05
- 2017년 2월 23일 목요일
하코다테 아침 시장은 역 근처에 있으며 북태평양에서 수확한 연어, 대게, 명태알, 청어알, 오징어, 대구 등의 신선한 어패류와 채소, 당도 높은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며 새벽 5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해서 12시면 문을 닫는다.라고 인터넷에 나온다. 나는 새벽 4시 30분이 조금 넘어 일어났다. 커튼을 열고 앞을 보니 활기를 띤 다는 아침 시장이 암만 봐도 활기가 없어서 다시 누워 있다가 5시에 다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왔다.
바로 앞이 호텔이라 씻기는 커녕, 안경 쓰고 옷만 걸치고 털레털레 나온 길이다. 새벽 5시가 훨씬 넘어가는 시간인데 활기가 없다. 문 연 곳도 있고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도 많다. 상인들 외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어정쩡하게 걷고 있는데 상인들의 시선을 다 받아서 걸어가는 곳마다 '차이니즈?'라는 소릴 가장 많이 듣고 간혹 '코리안?'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한 곳에선 중국 관광객들 한 무리가 오징어 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젊은 남자들이었는데 직접 낚시로 오징어를 잡아 회를 쳐 먹는 곳이었다. 낚시하는 재미가 쏠쏠해 보여 잠시 멈춰 서서 낚시하는 것을 구경했다. 우리나라 노량진 수산시장 정도 생각했다가 거기에 비하면 코딱지 만한 크기에 뻘쭘해져서 서둘러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은 이미 전날 블로그 후기를 통해 봤던 식당 중 한 곳이다. 이름도 까먹었는데 블로그 후기에 그렇게 당하면서도 역시나 낯선 곳에 갈 때면 늘 보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이곳에선 솔직히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맛은 크게 차이가 없을 것 같다. 결국 내가 먹으려는 카이센동은 손맛이 아니라 재료 맛이니까. 얼마나 신선한 재료를 쓰느냐인데 이곳에선 어딜 가도 신선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냥 와서 마음 내키는 대로 구경하다가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얘기다.
식당엔 아무도 없다. 잠이 덜 깬 젊은 여자가 나와 '이랏샤이 마세~'라고 반겨준다. 내가 첫 손님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미리 보고 온대로 주문했다. 사이즈를 정하고 위에 올려지는 것을 정하면 끝이다. 메뉴판이 대부분 일본어이고 일본어를 모르면 미리 찾아보고라도 오는 게 주문하는데 번거롭지 않다. 그리고 위에 올려지는 관자나 대게살이나 성게알 등은 간단한 단어들이니 일본어로 익혀두고 오면 좋다. 나는 대게와 관자와 성게알을 올린 작은 사이즈를 주문했다. 게살이나 관자 등은 사실 익히 맛을 알고 있던 것인데 도통 성게알은 그 맛이 궁금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못 먹고 나올까 봐. 나는 멍게, 성게, 말미잘, 해삼 등을 먹지 못한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해산물이다. 한국에선 비싸서 못 먹는다는 성게알을 여기서 먹어보기로 했다.
나온 비주얼을 보고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어 서둘러 핸드폰으로 한 컷 찍었다. 너무 맛있다. 큰 사이즈를 먹을 걸 그랬다. 밑에 밥이 깔려 있는 카이센동은 단촛물에 밥을 비벼 초밥을 만들고 그 위에 계절에 맞는 신선한 해산물을 올려 한 그릇을 만드는 일본인의 특성이 담긴 해물덮밥이다.
특히 성게알!! 우니!! 너무 맛있다. 정말 입안에서 녹는다. 이렇게 맛있다니. 성게알로만 다시 덮어서 하나 더 시킬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리나라에서 성게알을 먹어보질 못했으니 나한테는 비교대상이 없지만 상상하던 비린맛이나 그런 맛은 전혀 없고 정말 입안에서 살살 녹아버린다. 제일 맛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와 이번엔 과일 구경을 했다. 딸기를 가장 많이 내놓고 팔던데 딸기 철인가? 겨울인데? 이게 다 비닐하우스 딸기인가? 무슨 딸기가 이렇게 크단 말인가. 커다란 딸기가 눈길을 사로잡는 와중에 딸기보다 흔히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찾아봐서 익히 알고 있던 유바리 멜론이었다.
홋카이도 멜론은 원체 당도가 높고 맛있기로 유명한데 그중에서 유바리시에서 생산하는 유바리 멜론이 가장 맛도 좋고 값도 비싸다. 경매에서 유바리 멜론 2개들이 한 상자가 1500만 원에 팔렸다고 한다. 맙소사.
그 정도로 맛이 좋다길래 입가심으로 한 조각 사서 먹었다. 단호박 색의 유바리 멜론은 보기에도 달아 보이는데 엄청 육즙이 많고 엄청 달다. 가족끼리 왔다면 아예 한 통 사서 먹어도 좋을 것 같다. 시장에서 잘라달라고 하면 다 잘라준다. 카이센동과 멜론 한 조각에 일찍 일어난 보람이 있었다.
숙소에 와서 씻고 역에 갈 준비를 했다. 10시 5분 차인 데다가 바로 앞이라 느긋하다. 역 위층에 있다는 카페에 갈까 하다가 너무 느긋하게 준비하고 나와서 역 안에서 바로 도시락을 샀다. 남는 시간 동안 여유롭게 로비 의자에 앉아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방송국에서 나왔는지 리포터가 분주하게 인터뷰를 하고 있었고 역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더 분주해 보였다. 처음엔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 때문인 줄 알았다. 근데 하코다테까지 와서 인터뷰할 게 있나? 멍 때리고 앉아 있다가 한국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하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어떻게 된 거야? 가서 알아봐~"
그제야 개찰구 앞에 가보았다. 헉! 개찰구 앞 안내판에 친절하게 한국어로도 써져 있는 말은 눈 때문에 열차 탈선으로 오늘 삿포로로 가는 모든 기차 운행이 취소되었다는 말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눈이라니!
다시 한번 공항에서의 악몽이 떠오르며 멘붕이 되었다. 처음엔 그대로 다시 호텔로 들어가서 하룻밤 더 묵을까 싶었다. 객실은 있을 것 같았고 내일이면 다시 운행하지 않을까? 가서 물어보니 오늘은 물론이고 내일도 운행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언제 운행될지 모른다는 소리에 2차 멘붕. 말도 안 돼. 이 눔의 눈! 눈 보러 와서 눈 욕을 하고 있는 나.
다들 노트북을 켜고 멀 알아보는지 두들겨 대고 인포메이션에 줄을 서고 분주한데 나 혼자 멍하니 서있었다. 방송국 리포터는 열차 탈선인데 어떻게 온 건지? 그냥 하코다테 지방 방송국 아니야? 몰라. 내가 지금 그 생각하고 있을 때인가. 다시 가서 줄을 섰다가 물어봤다. 물어보았다고 간단히 쓰여있지만 일본어도 유창하게 못하는 데다가 구글 번역기 켜고 손짓 발짓해가며 한 말은 대략 이런 식의 대화였다. 하필 가장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였다.
나 : 오늘 삿포로 못 가나요?
직원 : 네. 오늘 삿포로 가는 기차 운행 전부 캔슬입니다.
나 : 그럼 내일은 운행하나요?
직원 : 잘 모르겠습니다.
나 : 그럼 언제 운행하나요?
직원 : 잘 모르겠습니다.
나 : 그럼 전 어쩌죠?
직원 :???
나 : 오늘 삿포로 꼭 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나요?
직원 : 어쩌고 저쩌고...(혼자 짜증내는 건가?) (영수증 같기도 한 긴 종이 한 장을 프린트해준다)
직원 : 오늘 가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긴 종이를 펼쳐 들고 첨 보는 역들을 읊어준다.)
종이에는 역 이름과 그 옆에 시간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그 종이에 의하면 삿포로로 가는 직통이 끊겼으니 우회해서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지방 역들의 이름들이 찍혀 있었고 시간도 돌아가는 거라 지금 이 시간에 출발해도 밤 9시 정도에 삿포로에 들어가는 길고 긴 하루 여정이었다. (화장실 가서 울고 싶어 진다.)
종이를 들고 나왔다. 그 긴 종이를 잊어버릴까 봐 손에 꼭 쥐고 동공 지진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본다. 방법은 없었다. 여기서 운행될 때까지 기다리던가 그냥 이 방법으로 돌아가던가. 어쩌겠나. 인생이 이 모양인 것을.
우선 모리 역으로 가야 했다. 여기서 11시가 다 되어 모리행 기차를 탔다.
모리 역은 작은 지방 간이역이었다. 몰랐던 사실이 있었는데 지방 역들의 특징은 에스컬레이터가 없다. 모두 계단이고 기차 안에서도 캐리어 놓는 공간이 따로 없어서 모두 위에 실어야 했다. 그 말인즉 내 26인치 캐리어를 기차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를 몇 번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모두 일행이 있었고 남자 일행들이 씩씩하게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들고 올라갈 때 나는 손목 인대가 늘어나도록 내 캐리어를 들고 지고 했어야 했다. 처음으로 나 혼자 온 것을 후회했다. 자꾸만 비행기 안에서 '여자 혼자 오셨어요?'하던 승무원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난 안다. 또 혼자 여행 갈 것을. 힘이 부쳐서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에 돌아와서 왼쪽 손목 인대가 늘어나서 혼났다. 지금도 사실 좋지 않다. 이건 여자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내 개인적인 체력의 한계였다. 살집은 있어도 죄다 물살이고 근력이라고는 한 개도 없는 나라서 그랬다. 26인치 캐리어라고 해도 무게는 15킬로그램 정도였다.
그렇게 내린 모리 역은 작았다. 모리 역에서 다음 역 까진 시간이 남아서 나는 이 역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처럼 역에서 대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캐리어에 커버를 씌웠다. 그리고 보니 겨울에 캐리어 끌고 다니면서 여태껏 커버도 안 씌우고 다녔다. 이미 다 긁히고 난리가 났는데 생각난 김에 검은색 커버를 씌우고 하코다테 역에서 사들고 온 에끼벤을 까먹었다. 로비 대기실 의자가 너무 협소해서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바로 앞에 난방기가 엄청난 온도로 돌아가고 있어서 다시 얼굴이 땅기면서 땀이 날 정도로 더웠지만 그래도 자리에 앉아 꾸역꾸역 다 먹었다.
모리 역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나니 뭔가 무서울 것도 걱정도 없어져서 될 대로 되라지 심정이었다. 점심을 먹고 앉아 있으니 한국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기차 노선을 보며 한참을 떠들고 있다. 젊은 여성 한 분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 여성분이 매표소에 뭐라고 물어보고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선 정보가 중요해서 철판 깔고 가서 물어봤다. 혹시 한국분이냐. 저도 삿포로 가야 하는데 아까 듣자니 다른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하면서.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얼굴의 그 여성분은 가족들과 함께 일본에서 머물다가 삿포로는 아니지만 삿포로 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홀로 여행 중인 중년의 한국 남성분께 삿포로 가는 방법에 대해 얘기해 주는 중이었다. 뒤늦게 끼어든 나한테도 시간이 없는데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하코다테에서 안내받은 대로 지방 역을 우회해서 가는 방법이었지만 모리 역에서 안내하는 방법은 조금 더 단축하는 방법이었다. 오샤만베까지 가는 특급열차를 타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다테몬베쓰에서 내리면 된다고 했다. 다테몬베쓰에서 삿포로 가는 기차가 있고 그렇게 가면 저녁 5시가 조금 넘어 도착하게 된다. 거의 3시간 넘게 단축되는 거라 모리 역 창구에서는 삿포로 가는 손님들한테는 그렇게 안내를 하고 있었다. 다만 창구에 있는 직원분이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라 언어가 안 통하니 그 여성분이 통역해서 알려주는 거였다. 이런 귀인을 만나다니!
일본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는 좋지 않은 기억들로 얼룩져 있지만 재난이나 위급한 순간의 대처 능력은 일본이 훨씬 더 월등하다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섬나라로 지진 등의 재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그런 시스템 구축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번 같은 경우만 해도 분명히 하코다테에선 기차로만 우회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모리 역까지 오는 사이 오샤만베 역에서 버스를 운행시키며 시간을 단축하게 할 방법을 찾은 거였다. 오샤만베 역에서는 가는 방향에 따라 관광버스가 대기 중이었고 손님이 차면 다른 버스가 또 와서 서는 식이었다. 물론 공짜이며 긴급 편성된 버스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버스를 타면서 든 생각은 한국이라면 어땠을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