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수프 카레.

북해도(北海道) 여행 06

by 볼파란

- 2017년 2월 23일 목요일

다시 돌아온 삿포로역. 여행기간 동안 가장 많이 가본 곳이 아마도 삿포로역이리라. 지금도 눈을 감으면 동서남북으로 뻗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그 역이 눈앞에 훤하다. 캐리어를 끌고 간 곳은 처음 삿포로에 도착해서 갔던 곳, 택시정류장이다. 오샤만베에서 탄 버스 덕분에 시간이 단축되어 저녁 6시쯤 삿포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몹시 피곤한 데다 빙판길에 캐리어를 끌고 갈 엄두가 안나 다시 택시를 탔다. 여행 내내 택시를 참 많이도 탔다. 친절한 기사님들, 땡큐-


삿포로에서 3박 4일 묵을 숙소는 '나카토노 호텔'이다. 홋카이도 여행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묵을 숙소이다. 3박에 2만 5천엔 정도였다. 사실 삿포로에서 묵을 숙소를 가장 오래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3박이나 묵어야 하기 때문에 편하기도 해야 하고 역에서 거리도 멀지 않으면서 비싼 호텔들을 제외하고 나니 갈만한 곳이 없었다. 내가 애용하는 부킹닷컴에선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호텔스닷컴 어플로 알아보던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났다.


그곳이 바로 '나카토노 호텔'이다. 이 호텔에 대한 후기들은 많지 않았다. 블로그 후기들 믿을 게 못된다 하면서도 후기들이 없으니 불안하기도 했다. 꽤 싼 편인데 갔다가 피보는 거 아닐까? 하지만 내가 직접 묵고 와서 그 어느 호텔들보다 좋았기 때문에 숙소 이야기 중에선 가장 길게 후기를 남겨 보기로 한다.

구글링으로 가져온 호텔의 정면


건물은 호텔이라기엔 굉장히 조촐하고 검소해 보인다. 심지어 택시 기사님들은 이곳을 제대로 알고 있는 분이 없다. 다른 큰 호텔들은 이름만 대면 알아서 가줬는데... 이곳은 잘 모르더라. 처음엔 호텔 명함을 챙기지 않아서 구글맵을 확대해서 보여줘 봤지만 영어 표기에 화면도 작아서 돋보기 쓰시는 기사님들이 알아볼 리 만무했다. 결국 센터에 전화해서 직접 호텔 이름을 대고 주소를 받아서 가주셨다. 하지만 역에서 위치는 나쁘지 않았다. 오도리 공원을 두 블록 정도 지나 골목에 위치해 있다. 삿포로 시내는 워낙 잘 짜인 바둑판같아서 찾기는 어렵지 않은데 나 같은 길치, 방향치들은 그 블록이 그 블록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예전에 런던 여행이 그랬다. 지갑을 두고 나와 숙소로 다시 가야 하는데 한 시간 가까이를 빙빙 돌았다. 맙소사! 모든 골목들 모든 집들이 죄다 똑같아 보이더라. 그 공포감이라니!) 역시나 떠나갈 때쯤 돼서야 나카타노 호텔을 걸어서 찾아갈 수 있었다.


호텔 안도 검소했다. 오래됐지만 손때가 묻어서 반질반질 깔끔한 느낌이랄까. 로비랄 것도 없이 바로 카운터가 보이고 오른쪽 옆에는 레스토랑이 바로 있고 왼쪽 옆에는 화장실과 계단이 있고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구조다. 카운터는 평소에 아무도 없다가 사람이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데 아마도 로비에 있는 CCTV를 모니터링하고 있다가 나오는 것 같았다. 다른 직원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사장님이 직접 나온다. (나이가 있으신 여성분이고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곱게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분으로 이곳의 사장님 같다. 한 블로거가 쓴 후기에 따르면 이곳에서 키우는 고양이들도 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호들갑 떨지 않고 예의 있게 잘 챙겨주시는 분으로 완전 내 스타일이셨다. 영어도 잘하는 편으로 영어로 얘기하기에 불편함은 없다. 뭐, 영어나 일어나 거기서 거기지만;)


내가 묵을 방은 일본식 다다미였다. 아늑한 공간에 들어서니 오늘 있었던 일들이 사르르 녹는 듯하다. 맘 같아선 그대로 누워 자고 싶다만 그러기엔 배가 고프다. 이미 밖은 캄캄해지고 귀찮아서 근처 편의점에서 요깃거리를 사와 먹고 말까 하다가 맘을 고쳐먹는다. 올 때부터 오늘 밤은 수프 카레를 먹기로 작정했던 터였다. 수프 카레는 홋카이도에 오면 꼭 먹어보라는 것 중에 하나다. 먹어보라는 걸 굳이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수프 카레 후기들을 찾아보니 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어 졌다.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몸을 일으켜 다시 숙소를 나섰다.


수프 카레는 일본 카레요리로 여러 가지 향신료를 사용한 묽은 국물에 해산물, 채소 등의 다양한 재료를 넣어 만든 음식이다. 맵기 단계도 조절 가능하고 넣는 재료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재료들도 큼지막하게 들어가 우리나라 카레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70년대 삿포로에서 처음 생겨나 지금은 일본 전역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맛볼 수 있다고 인터넷에 나온다. 우리나라에 판다는 수프 카레도 먹어보고 싶지만 그때 그 맛이 날까 싶다. 원래 맛집이란 맛도 맛이지만 그날의 분위기로 먹는 것이니까. 삿포로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부터 몇 군데 찾아봤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서 대기가 길어지면 곤란하니까 조금은 한가할 것 같은 곳을 찾아두었다. 숙소에서 멀지 않아서 일단 나가고 봤는데... 눈이 온다. 그냥 눈이 오는 게 아니고 엄청난 눈이 내린다. 문제는 너무 서둘러서 나왔는지 모자도, 우산도 다 숙소에 두고 나왔다. 다시 숙소에 들어가서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와야 하나 싶은데 의외로 우산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없다. 여기는 이 정도 눈은 아무것도 아닌가 보다. 그래서 나도 그냥 걸어가기로 한다.


눈은 점점 많이 내리고 구글맵을 켜고 가면서 확인해야 하니 장갑을 벗은 손은 너무 시리고 모자도 없이 다 맞고 가려니 눈도 못 뜨겠고 게다가 어두운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다. 총체적 난국.

눈 때문일까. 그래도 구글맵 켜고 찾아가는 건 했었는데 어쩐지 계속 돌고 도는 느낌. 골목과 골목들을 또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 아무래도 바본가 봐. 내가 찾는 곳은 수프 카레 전문점 '사무라이'다. 주문하기도 쉽고 숙소에서 멀지도 않은데 아직도 못 가고 눈길을 헤맨다.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아무것이나 먹을까 싶을 때 드디어 사무라이를 찾았다. 사무라이는 한눈에 찾기 힘들게 안쪽에 숨어 있다. 간판이 큰 것도 아니고 들어간 입구에 커다란 나무 문이 있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사무라이라는 영문이 붙어 있다. 오래되고 육중한 나무문을 열면 길고 좁은 계단이 이어져 있다. 그 계단으로 올라가면 바로 사무라이로 들어가는 또 다른 유리문이 있는 구조라 이건 무슨 해리포터 지팡이라도 사러가는 기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왼편에 대기실이 있고 오른편에는 주방과 혼자 와서 먹는 바 테이블의 1인석이 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지만 혼자라 올라가 보진 못했다. 이곳에서 요리를 해서 위층으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올려 보내는 것 같았다. 대기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이 없을 줄 알고 왔는데 이곳 역시 사람이 많다. 문 앞에서 대기자 명단을 받는 직원에게 '히토리데쓰'라고 하니 내가 일어를 잘하는 줄 알고 일어로 뭐라고 한다. 분명히 '나마에'라는 단어가 들렸는데 원래 알고 있던 단어도 갑자기 앞에서 그러면 못 알아듣는다. 영어로 네임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lee'라고 알려줬다. 그리고 보니 그 직원이 누굴 많이 닮았다. 페도라를 쓰고 귀엽게 웃는 얼굴이 누굴 닮았더라? 앗. 타블로와 비슷하다. 생각하고 다시 보니 똑 닮았다. 귀여운 페도라 쓴 타블로를 보자 꽁꽁 언 마음이 녹는다. 페도라 쓴 타블로가 알려준 대로 대기실에서 1인석 좌석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한국인들을 두 팀이나 만났다. 한 팀은 막 먹고 위층에서 내려오는 길이었고 다른 한 팀은 내 뒤로 들어와서 대기실에 함께 있었다. 관광객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직장인들 같았다. 여자 두 명에 남자 한 명. 영어와 일어 모두 잘했다. 부럽더라. 사실 내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어서 대기실에 오래 있기 싫었다. 눈에 흠뻑 젖은 데다가 하루 종일 시달리고 씻지도 않고 온 터라 빨리 뜨끈한 국물을 마시고 가서 자고 싶었다.


드디어 내 차례. 주문은 참 쉽다. 바로 앞에 간단한 영어로 어떻게 주문하는지 써 붙여놨다. 밥 사이즈를 고르고 맵기 단계와 수프 종류, 그리고 토핑을 고르면 된다. 나는 20가지 제철 채소와 밥은 M사이즈로 수프는 코코넛으로 시켰다. 물론 삿포로 클래식도 한 잔.

카메라는 가져가지 않아서 핸드폰으로 서둘러 한 컷. 절대 이 비주얼이 아님..ㅠㅠ


다른 곳은 가보지 않았으니 맛은 비교할 수 없지만 눈을 흠뻑 맞고 힘들게 찾아간 그날의 수프 카레는 내 영혼까지 위로해주는 맛이었다. 아마 다시 가서 먹어본다고 해도 틀릴 게다. 심지어 나는 홋카이도 마지막 날에 이 수프 카레집에 다시 갔다. 똑같이 시켜서 먹었지만 신기하게도 똑같은 맛은 아니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채소 카레를 시킨 건 신의 한 수. 싱싱한 채소들은 입안에서 살아서 달콤하게 씹히고 큼지막한 크기가 푸짐했다. 국물이 너무 맛있었다. 맥주와 함께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배가 불렀다. 아! 행복하다. 페도라 쓴 타블로에게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여전히 눈이 내린다. 수프 카레 힘으로 걸어서 가보려고 했으나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이 내려서 눈앞이 보이질 않는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간신히 숙소로 돌아왔다. 바로 코앞이었는데 택시를 타서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나는 또다시 나카토노 호텔을 설명해야 했다.


호텔 안에 대중탕이 있어서 하코다테에서 못한 목욕을 할까 하다가 다 귀찮아서 간단히 씻고 자기로 했다. (귀찮다는 말을 이 글에 몇 번이나 쓰는 것일까)

귀찮고 피곤해도 처음으로 만난 유카타는 입어봐야지.(일본에 몇 번을 왔는데도 나는 유카타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이불 장안에는 유카타 위에 걸치는 하오리까지 몇 벌 있어서 한 밤중에 다 들쑤셔서 패션쇼를 했다. 하지만 셀카봉도 없는 마당에 내 짧은 팔로는 위에 사진이 한계. 입은 것 그대로 벗어서 놓고 내가 싸온 잠옷을 입었다지. 역시 편한 건 내 잠옷이 짱.


그러나 밤에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밖에 공사하는 듯한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서 커튼을 제쳐보니 그 시간에 제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제설 차량이 골목을 누비며 엄청나게 쌓이는 눈을 치우고 있었다. 홋카이도 지역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눈이 많이 온다. 덕분에 제설에 대한 예산도 엄청나고 작업도 잘 되어 있다. 밤에 눈이 내리면 눈이 쌓이기 전에 제설 작업하는 곳이 많다. 이곳에 있는 동안 내내 제설 작업하는 소리를 들었다. 첫날엔 시끄러워서 못 자겠더니 나중에는 적응했는지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잤다. 그나저나 이렇게 내리다간 내일 아침이 또 걱정이다.


밤새도록 무섭게 내리는 눈. 그날 밤 숙소 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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