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北海道) 여행 08
- 2017년 2월 24일 금요일
오르골을 정신없이 한 시간 정도 구경하고 나오니 배가 고프다. 르타오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르타오는 치즈케이크로 유명한 홋카이도 디저트 가게다. 우리나라에도 지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서울에서도 가보지 못한 곳인데 오타루에 와서 본점을 찾아가게 되었다. "르타오 치즈케이크,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1층에 들어서니 매장에 근무하는 여직원들이 시식을 해보라며 초콜릿을 권유한다. 더 먹고 싶지만 정신을 차리고 한 바퀴 돌아봤다. 1층에는 르타오 제품을 판매하고 위층엔 카페가 있어서 쉬면서 차 한잔과 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 내가 온 목적은 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쉬면서 먹으려고 왔으니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르타오의 시그니처 메뉴인 더블 프로마쥬와 라떼를 시켰다. 치즈케이크엔 아메리카노가 더 어울리지만 라떼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나마 자리가 있어서 냉큼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주문을 했다. 커피 맛도 훌륭하다. 드디어 커피 다운 커피를 마시는구나! 치즈케이크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충분히 맛있었다. 당분을 보충하고 한참을 멍 때리며 앉아있었다. 옆 테이블에 중국 일가가 몰려와서 슬슬 나설 채비를 했다. 편견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스위스 여행 때 케이블카에서 만난 단체 중국인들의 목소리는 벌떼에 수십 방을 쏘인듯한 효과가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 뒤로 솔직히 단체로 온 중국인들만 봐도 피하게 된다.)
상점들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스시야도리로 넘어갔다. 스시야도리는 말 그대로 초밥가게들이 몰려있는 거리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맛있는 초밥을 먹을 수 있다니 안 갈 수 없었다. 찾아간 곳은 '스시 마루야마'다. 작은 가게였다.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며 자리를 안내하고 따뜻한 차를 내오면 사장님이 직접 싱싱한 회를 떠서 초밥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혼자라 바 테이블에 앉았다. 이미 여성 한 분이 와서 맥주와 함께 초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얼핏 한국분 같았는데 이 눈길에 원피스와 부츠로 멋을 내고 왔더라. 뭐랄까. 반갑게 인사하기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랄까. '나 건드리지 마'라는 포스가 있어서 존중해주기로 했다. 사실 나도 너무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배가 다시 부글부글 끓었다. 아까 먹은 치즈케이크와 라떼가 몽땅 다 잘 못된 것 같은 느낌. 여행 내내 속이 좋지 않아서 예민해져 있었는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먹을 수 없고 결국 초밥을 중간쯤 먹다가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ㅠㅠ 작은 가게였는데 나 혼자 천둥번개 맞고 있는 기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초밥은 하나하나 맛있었다. 다만, 어느 한 개는 고추냉이가 너무 많이 들어있었다. 저절로 오사카의 고추냉이 테러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무뚝뚝하지만 과묵하게 초밥을 만들고 있는 주인아저씨를 보니 그런 짓을 할리가 없어 보이는 장인의 포스가 느껴져서... 원래 이건 이렇게 맵게 먹는 것일 수도 있다고 위안하며 입안 가득 매운맛을 즐겼다. (하지만 너무 매웠어요! 아저씨! 왜 그러셨나요? 능숙하게 일어를 할 수 있었다면 물어볼 뻔하였다고요!) 배앓이를 하면서도 스시까지 클리어한 나란 여자는 대단한 사람. 자, 뱃속이여 부글거려라!
운하를 지나 천천히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거리를 나서니 날이 더 흐리고 눈까지 흩날린다. 보이던 관광객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산하다.
늦은 오후의 오타루 운하는 사람이 없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면 가스등이 켜질 것이다. 아쉽게도 운하에 가스등이 켜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잠시 고민했다. 기차 시간을 바꿔서 아예 밤에 들어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정쩡한 시간이라 시간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저질 체력은 금세 방전되어버렸다. 언제 또 화장실로 직행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아쉽지만 사진으로 수없이 봤던 오타루 운하의 가스등은 마음속으로 켜본다.
지나는 길에 만난 강아지 동상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겨울에 춥지 말라고 옷과 목도리까지 한 강아지 동상을 보니 자연스레 소녀상이 떠올랐다. 어린 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겠다며 거리 위에 앉아 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소녀상의 발을 만졌던 것도 학생들의 손을 잡았던 것도 기억났다. 소녀상의 발과 학생들의 손의 온도는 같았다. 하다못해 말 못 하는 짐승도 걷어들이고 동상까지 세우는 일본이면서 어째서 소녀상은 인정하지 않고 역사는 외면하는가. 내 생각이 너무 간 것 같지만 목도리까지 한 강아지 동상 앞에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
기차 시간까지 시간도 남고 눈도 내려서 오타루 역 아래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 들어갔다. 고요하고 한적하다. 한쪽에는 카페도 있어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멋쟁이 할아버지가 커피를 내려주는데 마일드부터 다크한 맛까지 고를 수 있다. 관광센터라고 해서 맛있을까 싶더니 커피맛도 좋았다. 일본은 어딜 가더라도 커피맛이 중간 이상은 하는 것 같다.
다음에 오타루에 오게 된다면 밤에 올 것 같다. 해가 지고 나면 이곳은 운하에도 거리 곳곳에도 하다못해 역에도 가스등이 켜지기 때문에 빛의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다. 아쉬움이 있어야 다시 오고 싶을 테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기차에 몸을 싣는다.
곧 다시 삿포로 역에 도착했다. 곧장 스텔라 플레이스에 있는 JR 타워 T38전망대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도착한 전망대의 전경에 입이 떠억 벌어진다. 전망대를 많이 다녀 본 것은 아니지만 이곳 전망대는 360도로 보이는 삿포로 시내의 동서남북 전경과 함께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한 몫한다. 물론 내가 사람이 없을 때 가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창가마다 자리가 있어서 짐을 놓고 앉았다. 한 바퀴 빙 돌면서 사진도 찍고 이 질서 정연한 도시의 풍경에 감탄했다. 한참을 돌다가 다시 자리로 와서 앉았다. 아직 관광객보다는 저녁의 여유를 찾아서 온 현지인들이 많아 보였다. 그들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보다는 자리에 앉아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따위를 시켜두고 하루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 같았다. 고요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문득 회사 다닐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고요하게 내려다보면서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만두지 않았을까? 아니면 훨씬 빨리 그만뒀을까?
나도 한참을 앉아있다가 배가 고파져 이곳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할 것인지 생각하다가 발이 닿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삿포로 역 근처에는 백화점이 여러 곳이다. 한국 사람들은 백화점 어딜 가나 쉽게 만날 수 있다. 나야 무지(MUJI) 정도에 들려서 아이쇼핑을 해도 충분했지만 정신없이 물건을 사는 그들을 보며 나도 같이 덩달아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필요도 없는 무지의 하얀색 캔버스화를 들었다 놨다 했다. 기껏 조용한 전망대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내려온 터라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다이마루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오니기리 몇 개를 사서 숙소로 향했다.
호텔로 돌아와 오니기리를 먹으며 처음으로 일본 TV를 봤다. 언어를 모르는데도 알 것 같은 프로그램이다. 남자 두서너 명이 과장된 몸짓으로 식당으로 향한다. 맛집을 탐방하는 코너다. 맛을 표현하는 남자들의 몸짓과 표정만으로 음식의 맛을 알 것 같다. 다른 데로 돌리니 차분한 분위기에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음악 하는 남자였는데 지방의 고요하고 한적한 어딘가로 떠나서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글을 쓰는 것 같다. 한물간 음악가의 삶과 인생? 혹은 사람과 사람들? 지구는 둥글고 언어는 달라도 만드는 프로그램들은 비슷해졌고 그걸 보는 나도 비슷해졌다. 이젠 오지로 들어가지 않는 한 세상 어디를 가도 낯선 느낌은 없어졌다. 2002년도에 처음 비행기를 타고 떠났던 배낭여행과 2017년 26인치 캐리어를 끌고 떠난 여행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코다테에서 못 해본 호텔 온천욕을 오늘 하기로 했다. 나카토노 호텔에는 작은 대중탕이 있다. 남녀가 따로 있진 않고 혼자서 혹은 가족끼리 들어가서 문을 잠근 후 하면 된다. 내가 갔을 때는 다행히 아무도 없어서 나 혼자 원 없이 씻을 수 있었다. 유카타를 입고 가서 개운하게 씻고 돌아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곳에서는 하루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 든다. 아, 개운해라!
내일은 호헤이쿄에 가기로 했는데 오늘 밤 호텔에서 씻고 나니 마음이 두 갈래 길이 되었다. 갈까 말까. 굳이 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고 먼 곳까지 나 혼자 버스 타고 갈 생각을 하니 가고 싶지 않았다. 난 원래 온천에 대한 로망이 없다. 그러니 일본을 몇 번을 오가면서도 온천욕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다. 한편으로는 평소에 안 해봤으니 이곳까지 왔는데 가까운 곳에라도 한 번 가볼까 싶어 졌다. 보통은 노보리베츠에 많이들 간다는데 나는 거기엔 안 가도 삿포로 근교에 있는 호헤이쿄에는 가볼까? 에라,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마음이 동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오늘 밤은 솔솔 잠이 잘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