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北海道) 여행 09
- 2017년 2월 25일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고 천정을 올려다보며 뒹굴거렸다. 눈을 뜨고 나서도 아직 호헤이쿄에 갈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호헤이쿄 가기가 너무 귀찮았다. 삿포로 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조잔케이 온천이 있다. 조잔케이 온천은 삿포로 근교에서 쉽게 온천욕을 즐길 수 있어 일본인들도 많이 간다. 온센 팩이라고 온천과 버스비를 함께 묶어 판다. 조잔케이에 여러 곳의 호텔이 있고 마음에 드는 호텔에 가면 된다. 하지만 나는 조잔케이에서도 더 들어가서 있는 호헤이쿄 온천에 가기로 한 것이다. 더 멀긴 하지만 오래된 일본 전통 노천 온천을 즐기고 싶어서였다.
근데 너무 귀찮아졌다. 맘 같아선 느긋하게 일어나 오늘 하루쯤은 삿포로를 어슬렁거리며 다니고 싶어 졌다.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씻고 화장까지 다했다. 옷까지 다 입고서야 이놈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또다시 요동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이런 젠장! 온천에 갈 거였으면 눈꼽도 안 떼고 가도 되었다고!! 화장까지 다 했는데... 나는 다시 호헤이쿄 갈 준비를 서둘렀다. 세면도구를 챙겨 넣고 호텔 사장님께 수건도 빌렸다. (온천에선 수건을 무료로 주지 않는다. 온천 간다고 호텔에서 수건 챙겨가는 게 민폐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온천 간다니까 커다란 타월과 세수수건까지 다 주셔서 감사할 따름. 물론 가방이 한정적이라 큰 타월은 다시 돌려드렸다.)
아침도 안 먹고 갔는데 호헤이쿄 행은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맙소사. 시간표도 미처 챙겨보지 않고 무턱대고 발걸음부터 한 게 잘못이지. 조잔케이행과 호헤이쿄 행은 다르다. 호헤이쿄는 끝에 있어서 조잔케이를 들렸다 가지만 조잔케이행은 조잔케이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버스 종류도 일반버스와 갓파 라이너라고 급행버스로 나뉘어 있다. 갓파 라이너는 예약제이고 예약한 사람 먼저 태우고 자리가 남으면 그때 가서 사람을 태운다. 예약은 오로지 전화로밖에 받지 않으니 일어를 모르는 나는 할 수 없다. 줄 서는 곳에 가면 약간 어리바리한 젊은 남자가 일일이 예약자를 확인하고 안내해준다. 간단한 영어도 하니 미리미리 물어보고 타면 된다.
버스 터미널은 역 바로 옆에 있다.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면 백화점과도 연결되어 있고 식사할 가게들도 보인다.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충분히 늦은 아침을 먹고 와도 되건만 안 가려다 가려니 갑자기 조급함과 초조함이 찾아왔다. 주말인 데다가 사람이 많아서 차를 못 탔다는 얘기도 본터라 맘 놓고 먹을 수가 없었다. 이왕 가기로 했는데 차를 놓치거나 사람이 많아서 못 가게 되면 너무 싫을 것 같았다. 나는 묘한 오기와 고집이 있어서 하기로 한 것은 꼭 해내야 한다. ㅠ
결국, 밑에 내려가 빵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다시 올라왔다. (하하하, 그 추운데 아이스를 산건 버스에 타거나 들고 있으려면 뜨거운 것보다 차가운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올라오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럴 수가! 알고 보니 서있던 사람들은 다른 행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었고 사람들 모두 시간표에 맞춰서 때가 되면 와서 줄 서 있지, 나처럼 한 시간이 남았는데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류장에 서서 빵을 뜯으며 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나의 조급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다시 내려가서 의자에 앉아 꾸역꾸역 빵을 먹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람!
주말이라 온천에 가는 사람들은 꽤 있었다.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 중년의 부부들이거나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주말 아침 느긋하게 아침을 차려 먹고 따뜻한 온천을 즐기기 위해 간단한 세면도구를 챙겨 나온 노부부의 모습이 귀엽고 따뜻해 보인다. 줄은 서서 타지만 내가 생각한 대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차를 못 타는 일은 없었다. 갓파 라이너가 도착해서 예약자를 먼저 태우고 탔다. 예약자는 거의 없었고 나는 차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때문에 뱃속이 잔뜩 차가워졌는데도 긴장이 풀리니 금세 잠들었다. 한 참을 자다가 일어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길은 구불구불해지고 눈이 점점 굵어지고 풍경은 점점 도시의 풍경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어딜 봐도 눈이 엄청 쌓여 있다. 눈, 눈, 눈. 생크림 같은 소복한 눈이 끝없이 내리고 끝없이 쌓여간다. 눈은 현실의 모든 풍경들을 덮어서 온통 새하얗다. 온갖 색깔을 칠하고 위에 까만색 크레파스를 덧칠해서 벗겨내는 스크래치 효과처럼 세상을 하얀색으로 덧칠한 느낌이다. 벗겨내지 말고 그냥 하얀 세상으로 남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잔케이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여기에서 흔들려 따라 내리면 안 된다. 호헤이쿄는 더 가야 한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더 들어갔을 때쯤 호헤이쿄에 도착한다. 사실 눈이 내리니 그냥 조잔케이에 내릴 걸 싶었지만 막상 도착해서 내리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조잔케이에서 내려서 걸어와도 되지 않냐고 하던데 겨울에 절대 해서는 안될 무모한 짓이다. 우선 너무 눈이 많아서 걸어서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걷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걷다가 조난당한다. 눈이 없는 여름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대체 누가 이곳까지 걸어온단 말인가.
1층엔 식당이 있어 사람들로 북적인다. 12시가 넘어 도착한 터라 향긋한 냄새에 배가 고파졌지만 우선 온천을 먼저 해야 한다. 표를 보여주고 들어가면 순서에 맞춰 착착 진행된다. 먼저 귀중품을 맡기는 곳이 나온다. 우리나라 목욕탕은 락커룸에 옷이나 귀중품을 함께 넣고 키 하나만 갖고 들어가면 되지만 일본은 다르다. 귀중품만 맡기고 옷은 안에서 벗어 바구니에 넣어두고 들어간다. 물론 짐을 몽땅 다 넣으면 안 되고 탕에 들어가서 씻어야 할 세면도구와 수건은 가지고 올라가야 한다. 다시 올라가면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서 들어간다. 앞에는 화장대도 갖추어져서 씻고 나와 화장과 머리를 말릴 수 있다. (드라이기는 유료)
처음엔 탕 앞에서 옷을 훌렁 벗어서 바구니에 넣어두고 가는 게 어색했다. 옷을 가져가는 사람은 없나 보다. 일본의 온천 에티켓 중에서 탕에 들어갈때 수건으로 가리고 들어가고 물에 들어갈때도 수건을 머리에 얹으라는 얘기를 들었다. 전반적으로 조심하는 편이었고 나이 든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뚜렷했지만 일본의 젊은 사람들은 또 막상 보니 다 알아서 다니더라. 내 생각은 적당히 가리되 너무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탕 안에서 수건으로 가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일본 에티켓 찾아보고 온 관광객들이어서 속으로 웃음이 났다.
노천 온천욕을 즐기기 전에 작은 대중탕에서 씻고 나가야 한다. 시설은 굉장히 오래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목욕탕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낡았다. 대중탕 안에도 몸을 담글 수 있는 탕이 있지만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노천온천이다. 얼른 씻고 나갔다.
아! 내가 이걸 느끼려고 왔구나!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노천 온천을 왜 즐기는지 알 것 같았다. 눈이 내리는 겨울 풍경인데 옷을 벗고 따뜻한 물 안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상쾌하고 아늑했다.
눈이 내리니 더 좋았다. 따뜻한 물에 닿아 수증기로 연기를 내며 올라갔다. 신선놀음이 따로 있을까? 여기 와서야 엄마 생각이 났다. 나처럼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온천에 함께 갈 생각을 안 해봤는데 이런 노천 온천은 좋아하실 것 같았다. 언제 함께 올 수 있을까? 탕은 꽤 넓었고 어린 딸과 함께 온 모녀, 친구들끼리 놀러 온 일본 소녀들, 나처럼 혼자 온 중국인 여자 등이 함께 온천욕을 즐겼다. 혼자 온 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자리를 바꿔가며 한참을 놀다가 배가 고파서 일어났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치킨 마샬라 커리를 시켰다. 이곳은 생뚱맞게 인도식당으로 커리를 팔고 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인도 사람들이다. 그리고 꽤 유명하다. 심지어 이 식당의 난과 커리를 먹고 싶어서 다시 오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인도 사람들 보고 너무 신기했다. 어쩌다가 멀고 먼 북해도의 호헤이쿄에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 인도는 눈을 볼 수 없는 나라인데 사방이 눈인 곳에서 일하는 기분은 어떨까?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거의 비슷하게 움직여서 식당엔 자리가 거의 없었다. 간신히 뚫고 들어가 밖이 보이는 창가 앞자리를 차지했다.
겹겹이 쌓인 페스츄리 같은 눈을 바라보며 인도 커리를 먹었다. 커리는 딱 내가 생각한 만큼 맛있었다. 커리보다는 난이 쫄깃하고 더 맛있다. 문제는 창가에 앉아 먹다 보니 겨울이라 난과 커리가 빨리 식었다. 식기 전에 먹어야 더 맛있기 때문에 난은 다 먹었지만 커리는 조금 남겼다.
맥주 생각이 간절해졌는데 나의 뱃속 상태가 완전히 깨끗하지 않았고 삿포로에 가서 바로 맥주 박물관에 갈 예정이라 참았다. 온천을 즐기고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니! 대신 후식으로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녹차는 굉장히 진한 맛으로 씁쓸하면서 단 완전 내 취향이었다. 배가 부르니 방안에서 따근 하게 몸을 데우고 한 숨 자고 싶었다. 곳곳에 휴게소처럼 따뜻한 방이 있고 마사지도 즐길 수 있다. 온천과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차 시간을 기다리며 저마다 드러누워 잠을 자거나 쉬고 있었다. 나도 한 군데 자리 잡고 앉았다. 호헤이쿄에 오는 이유는 단순 명료하다. 낯설지 않은 대중목욕탕의 향수가 있고 근사한 풍경에 노천욕을 즐길 수도 있으며 생뚱맞지만 인도인이 만드는 커리와 난을 맛볼 수 있다. 다시 꼭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시간이 되어 밑으로 내려가려는데 한 백인 여성이 눈에 띈다. 관광객들이 꽤 있었지만 백인은 한 명도 없었다. 짧은 머리의 중년 여성은 팔에 깁스를 한 채 온천을 즐기러 왔다. 혼자 와서 눈이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너무 말을 걸고 싶었다. 어디서 왔고 깁스까지 한 채 이곳까지 온 이야기도 궁금했다. 그리고 보면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닌가 보다. 남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내 영역을 넘어오는 사람을 싫어하는 거겠지. 사람과의 정서적 '거리'는 내게는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사람을 궁금해하면서도 '거리'에 예민한 편이라 다른 사람에게 말 걸기가 쉽지 않다. 혹여 그 사람만의 중요한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는 것일까 봐 다가가기 힘들다. 대학 신입생때만 해도 거침없이 말걸어 친구도 사귀었던 나인데. 그렇다면 나는 변한 것일까?
암튼 깁스를 한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소라도 지어줄까 열심히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보다는 자연 속에서 명상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조심히 그 앞을 지나쳐 내려갔다. 모쪼록 이곳의 여행이 좋은 치유의 힘을 전해주길!
버스는 내린 곳에서 다시 타면 된다. 사람들을 내려주고 다시 태우고 돌아서 간다. 시간에 맞춰 온 버스는 또다시 갓파 라이너다. 역시 예약자 먼저 태우고 탔다. 2시 50분 차를 타고 삿포로 역으로 출발한다. 온천을 하고 노글노글해진 터라 바로 곯아떨어졌다.
이렇게 잠을 잘 자다니! 수면 장애가 있는 분들은 온천을 해보시라. 아니면 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