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北海道) 여행 10
- 2017년 2월 25일 토요일
버스에서 단잠을 자고 나니 삿포로 역에 다시 도착했다. 바로 도큐 백화점 남쪽 출구로 향한다. 남쪽 출구 3번 정류장에서 맥주박물관 가는 버스가 선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박물관이 저녁 8시면 문을 닫고 맥주 시음은 그전에 끝난다고 해서 마음이 급한데 눈까지 오니 환장하겠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했다. 박물관 가는 사람은 나 말고 혼자 오신 남성분 정도다.(사진 가운데)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오셔서 사진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찍으셨다. 혼자 많은 여행을 다닌 연륜이 느껴지는 포스랄까. 문득 내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졌다.
100년이 훨씬 넘은 붉은 벽돌 건물과 상징적인 빨간 별 모양이 새겨진 굴뚝이 반겨준다. 오래전 사용하던 맥주통들도 입구에 쌓여 있어서 방문객들은 앞에서 사진도 많이 찍는다. 눈발이 흩날리니 사진이고 뭐고 서둘러 입구로 들어선다. 그때까지도 카메라 메고 같이 내린 아저씨는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들어가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당연히 맥주 시음이 가능한 로비홀이다. 홀은 생각보다 넓고 사람들이 많았다. 천정의 조명은 맥주병으로 만들어져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의자도 별 모양으로 뚫린 예쁜 나무 의자였다. 그야말로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장소다.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다양한 언어가 홀을 가득 메웠다.
내가 원한 건 맥주 박물관의 '박물관'보다는 '맥주'였다. 남들은 박물관 구경을 다 마친 후에야 하는 맥주 시음을 나는 정반대로 했다. 맥주가 급해서 맥주부터 마셨다. 들어가자마자 자판기에 가서 맥주 3종 티켓을 사서 로비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보여줬다. 맥주 3종 세트와 과자가 함께 나온다.
맥주를 마시는 모습도 나라마다 달랐다. 백인들은 대체적으로 자리에 서서 자유롭게 마시며 떠들어댔고 아시아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같이 온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는 분위기다. 내가 혼자 와서 3종 세트를 시켜 앉으니 맞은편에 서서 마시던 백인 남자가 잔을 들어 공중에서 치얼스 해준다. 어색한 웃음을 날려주었다. (하하하.)
나는 무조건 여기 오면 3잔 모두를 클리어할 작정이어서 머뭇거리지 않고 시켰는데 시음 잔인데도 불구하고 꽤 크다. 맥주는 맛이 다른 3가지 종류로 블랙라벨과 클래식 그리고 카이타쿠시 맥주다. 블랙라벨(사진 左)은 발란스가 훌륭한 맥주고 클래식(사진 中)은 목 넘김이 좋고 카이타쿠시(사진 右)는 개척시대 레시피 그대로 만든 조금은 거친 맛이 느껴진다. 나는 카이타쿠시 맥주가 가장 좋았다. 맥주를 마시고 바로 맞은편에 가서 이 맥주컵을 하나 샀다. 맥주 박물관의 전경이 새겨진 맥주잔이다. 맥주를 사갈 엄두는 안 났지만 맥주컵은 꼭 사가고 싶었다. 박스 포장도 해줬는데 한국까지 무사히 데리고 들어왔다. 오히려 깨진 것은 오타루에서 동생 주려고 샀던 곰인형 오르골... ㅠ 분명히 포장해주던 한국분이(오르골당에는 한국 직원이 있다) 이 정도면 핸드캐리로 들고 타도 안 깨질 거라고 했는데 와서 보니 곰인형 목과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제품이 사기 재질로 만든 곰인형이다 보니 튼튼하지는 않다. 그래도 순간접착제로 잘 붙여서 사용하고 있으니 되었다. (오르골 살 때는 잘 깨지는 재질인지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과자도 제대로 먹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3잔을 순식간에 비웠다. 술기운이 올라왔다. 술기운의 힘을 빌려 그제야 박물관 구경을 나섰다. 나란 사람도 참 대단하다.
그 옛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만들어 냈을 엄청난 크기의 대형 가마를 지나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갔다. 일본의 맥주 개척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살펴보고 맥주의 재료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 한국어 가이드도 있으니 관람하는 데 힘든 점은 없다. 삿포로 맥주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옛날 광고와 로고의 변천 등이 흥미로웠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의 그림 광고는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삿포로의 로고 변천도 재미있었는데 역시 최근 것이 심플하다. 리뉴얼의 핵심은 아이덴티티의 색을 강조하면서 덜어내고 간결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맥주 맛은 변함없이 유지하면서 간결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것. 별하면 삿포로를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다.
온천하고 맥주까지 마셔서 술기운이 오르니 박물관 탐방은 원하는 것만 보고 내려왔다. 주위에 쇼핑몰과 징기스칸을 먹을 수 있는 곳도 있어서 가족단위로 오기에도 좋다. 징기스칸 케세이 홀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배틀 트립 장도연과 박나래가 가서 먹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양고기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데 징기스칸은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 이번 홋카이도 여행 중에서 궁금했던 징기스칸은 결국 먹지 못했다. 바로 옆에 있어서 가볼까 생각했지만 예약을 해야 하고 다른 혼밥은 상관없었지만 이상하게 고기를 혼자 가서 구워 먹고 싶지는 않아서 발길을 돌렸다. 역시 난 아직 혼밥 하수다.
조금 걸어 내려오면 맞은편에 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보니 건물 전체가 다 보인다. 빨간 벽돌 지붕 끝에 달라붙어 있는 작은 모양의 빨간 별들이 너무 귀엽다. 작은 디테일이 사람을 끄는구나. 친구들을 한국으로 초대했던 알베르토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사실 시점으로 보면 여행을 다녀와서 한참 후에야 알베르토의 방송을 보았으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 글을 쓰는 지금 든 생각이다.) 알베르토는 비정상회담의 패널로 활약했던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이다. 음식에 대한 얘기 끝에 일본은 자국의 음식 홍보를 엄청 잘하는데 한국은 훌륭한 음식문화를 갖고 있음에도 홍보를 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음식에만 국한되겠나. 일본은 디테일에 강하다. 일본의 경제가 한창이었을 때 회사 언니들은 일본으로 출장을 가서 몇 보따리의 캐릭터와 문구류 샘플들을 사 왔었다. 그 샘플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은 우리 같은 신입들의 몫이었는데 힘은 들었지만 나는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 뭐든 작고 아기자기하게 만드는 일본의 제품들에 푹 빠져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일본의 힘이기도 하다. 전통을 지키며 갖고 있는 것들은 심혈을 기울여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쓰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낮에는 보이지도 않던 빨간 별에 흥분해서 귀여워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오늘은 삿포로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내일 아침 일찍 아바시리로 넘어가야 한다. 물론 다시 돌아와 하룻밤을 더 머물고 한국에 가지만 그때는 시간이 별로 없다. 돈키호테에 들려 선물을 몇 가지 샀다. 유바리 멜론으로 만든 제품들이 많았다. 달긴 하지만 먹을 만하다. 어느 돈키호테든 직원이 친절한 경우는 거의 못 봤던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친절한 편이라고는 해도 돈키호테에서 일하다 보면 힘들어서 짜증이 많이 나나보다.라고 스스로에게 이해시켰다. 스스키노 돈키호테는 층도 많고 크기도 커서 다 둘러보기도 벅차다. 계산할 때 주의할 것은 약품 코너에 있는 것들은 거기서만 계산할 수 있다. 난 그것도 몰라서 동전파스 사가지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계산했다.
돈키호테에서 나오자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한다. 오늘도 난 우산도 모자도 가져오지 않았다. 대체 갖고 다닐 것도 아니면서 털모자와 우산은 왜 가지고 온 것일까. 내 몸 하나도 힘들어서 자꾸 나갈 때는 짐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DSLR 카메라도 거의 안 갖고 다녔다. ㅠㅠ
그리고 보니 막상 삿포로 시내를 찬찬히 구경할 시간은 없어서 테레비 타워나 시계탑은 정말 오고 가면서 본 것이 전부가 되었다. 삿포로 시내는 지하의 도시이기도 하다. 눈이 많이 오는 관계로 역에서부터 길고 긴 지하도가 발달되었다. 우리나라 부평처럼 복잡하지도 않다. 심플하게 직선으로 길게 뚫려 있고 중간중간에 나가는 방향 표시가 있어서 원하는 곳에서 밖으로 나가면 된다. 그러니 눈이 내리거나 비가 와도 지하도로만 다니면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다.
나도 지하도를 이용했지만 될 수 있으면 밖으로 다녔다. 폐쇄공포증까지는 아니지만 바람이 통하는 창문 하나 없는 공간을 싫어한다. 거기다가 사람까지 많으면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난다. 출퇴근길 지하철을 싫어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이유로 버스가 더 좋다. 사고 날 위험은 지하철보다 더 많지만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인달까.
해서, 나는 지하도를 걷다가도 꾸역꾸역 밖으로 나왔다. 게다가 몸에 열이 많아 추위도 심하게 타지 않는다. 오히려 많이 껴입고 걷다 보면 더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마지막 밤이기도 했고 눈을 맞으며 걷다가 눈이 수북하게 쌓인 오도리 공원에서 나 혼자 러브 스토리를 찍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고 눈이 내리고 눈도 쌓여있고 마침 보이는 맞은편 테레비 타워에도 불이 들어와 있어서 핸드폰을 켜고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정말이다. 말 그대로 뱅글뱅글 돌면서 하하하,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누가 봤으면 미친 X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 라면과 요깃거리를 사들고 왔다. 눈 오는 날은 따끈한 라면 국물이 진리다. 여전히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장님한테 내일 아침 6시 30분에 체크아웃하겠다고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내일은 먼 거리 이동이라 긴장이 된다. 설마 다시 눈에 갇힐 일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