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北海道) 여행 11
- 2017년 2월 26일 일요일
드디어 아바시리 가는 결전의 날이 밝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미리 싸 둔 짐을 챙겨서 내려가니 사장님을 비롯해서 직원분이 나와계시고 부탁드린 대로 택시도 미리 와있었다. 여기서 조금 감동했는데 택시에 짐을 싣고 내가 떠나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해주었다. 과한 대우에 어색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웠지만 감동받았다. 자칫 일본의 과한 친절은 가식적이거나 속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나카토노 호텔의 친절은 그런 느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정성껏 손님을 대접한다는 소박하고 친절한 마음이 역력히 느껴졌다. (이 느낌이 더욱 강하게 된 것은 홋카이도의 마지막 밤 갔던 대형 호텔과의 비교 덕분이다.) 사장님께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고 마음을 전하고 헤어졌다. 서운하지만 깔끔한 헤어짐이었다. 만약 내가 서비스업이나 숙박업을 하게 된다면 나카토노 호텔의 사장님을 롤모델로 하겠다. 꼭 다시 가길 바라면서 아쉽지만 역으로 향했다.
아바시리행은 7시 20분 차. 문제가 없다면 아바시리에 도착하는 것은 12시 40분이다. 기차만 5시간 30분 가까이 걸리는 대장정이다. 홋카이도 여행을 계획하게 된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아바시리 유빙 때문이었다. 오호츠크해와 맞닿아 있는 홋카이도의 북동쪽 끝에 아바시리가 있다. 유빙은 러시아의 아무르강에서부터 한 시간에 1~2킬로미터씩 천천히 흘러 아바시리까지 도착한다. 유빙을 관측할 수 있는 시기는 겨울부터 초봄까지는 가능하며 가장 좋은 시기는 2월이다. 유빙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나는 가장 무난하게 쇄빙선인 오로라를 타고 볼 계획이다. 미리 한국에서 아바시리 오로라호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하고 왔다. 1박 2일 머무는데 어떤 날 유빙을 볼 수 있을지 몰라 도착하는 날과 다음 날, 모두 예약했다. 유빙의 유무는 당일 홈페이지나 선착장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미리 알 수 없다. 일종의 복불복인 셈인데 후기들을 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유빙을 보지 못하고 왔다. 오로지 유빙 때문에 왔는데 보지 못하고 가면 서운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멀고 먼 기차 여행을 하지 않는가!!
에끼벤과 오니기리와 커피까지 사들고 기차를 탔다. 아바시리행 기차는 짐을 놓는 곳이 따로 없다. 이런 망할! 지난번 하코다테에서 캐리어를 옮기느라('21. 삿포로 원정대' 참고) 손목이랑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또다시 선반에 올려두어야 했다. 혼자 낑낑 거리니 젊은 여성분이 "유캔 두잇"이라며 도와줬다. 밝게 웃는 모습이 예쁜 학생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아이캔 두잇"이라고 화답해줬다. 하하하.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 기간이어서 아바시리 가는 중에 크로스컨트리 하는 선수들을 만났다. 새하얀 눈밭에 선수들이 스키를 지치며 나가고 있다. 보이지는 않겠지만 나도 모르게 선수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눈 내리는 풍경은 똑같아 보이지만 다 다르다. 아바시리 가는 풍경은 거칠다. 하늘과 땅이 모두 하얗게 변해서 경계선이 모호하고 연신 바람에 눈가루가 흩날렸다. 눈 내린 설산은 한 편의 수묵화 같다. 어쩌면 저렇게 근사할 수가! 기차는 중간에 엔가로 역에서 자리를 돌려야 한다. 가는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정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승객들이 직접 돌려야 하며 마치 야구장에서 파도치며 응원하듯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돌려줘야 한다. 갈 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신발도 벗고 이어폰을 꽂고 비몽사몽간에 부랴부랴 일어나서 자리를 돌리고 짐을 옮겨야 해서 뒤엣분이 도와주셨다. 물론 다시 삿포로로 돌아올 때는 잊지 않고 있다가 제대로 돌려주었다.
5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은 생각보다 할만했다. 아바시리 역에 내려서 보니 눈밭을 달려온 기차는 얼음으로 꽁꽁 얼어있다. 수고했어! 아바시리에서 묵는 호텔은 역에서 엄청 가깝다. 역에서 나와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바로 앞이다. 루트인 호텔이고 하룻밤 7,900엔이다. 특히 로비에서 대기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들도 많고 컴퓨터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도토루 커피가 공짜다.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아 짐만 맡겨 두고 커피를 마시며 어딜 가야 할지 찾아봤다.
오는 길에 오늘 유빙은 없다는 사실을 이미 홈페이지를 통해 알게 된 터였다. 내일 오전에도 없으면 그대로 삿포로로 가야 한다. 제발 내일은 있어주길! 아바시리는 유빙 말고는 볼 곳이 많지 않다. 유빙관이나 아바시리 감옥 정도가 고작이다. 유빙 볼 생각으로 온터라 감옥 하고 유빙관 둘 중에 하나 정도만 들려보고 일찍 돌아와 쉴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감옥은 당기지 않았고 유빙관만 보고 오자고 나선길에 정말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었다. 유빙관과 감옥은 같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감옥에 먼저 서고 유빙관은 더 가야 한다. 대부분은 그 두 곳 다 가지만 나는 분명히 유빙관에 갈 생각이었는데 내린 곳은 아바시리 감옥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내린 결과다. 오랜 기차여행으로 머리가 멍해졌는지 버스에서도 넋을 놓고 있다가 사람들이 내리는 곳에 나도 모르게 내렸다. 내리고 표를 끊을 때까지도 나는 이곳이 감옥인 줄 몰랐다. 당연히 유빙관인 줄 알았다. 뭐에 씐 것이 분명하다. 엄마 아빠와 함께 여행 온 젊은 여성이 나를 눈여겨봤는지 표를 끊으려 가는 내 뒤로 나를 불렀다. "저 한국분이시죠?" "네..." "쿠폰 가져오셨어요?" "아뇨..." "저희는 이미 표 끊었는데 쿠폰을 넉넉하게 프린트해와서 남아요. 이거 쓰시겠어요? 10% 할인이에요." 프린트된 쿠폰을 받아 들고서야 나는 이곳이 아바시리 감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마 그분께 '어멋! 전 유빙관에 가려고 했어요!'라고는 말 못 하고 감사인사를 전하며 어쩔 수 없이 10% 할인 쿠폰을 이용해 표를 끊었다. 허허헛.
문제는 감옥이 너무 넓었다. 한 군데 있는 건물이 아니었고 시설별로 여러 군데 나뉘어 있는 데다가 눈이 쌓인 건물들 안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내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에 비해 감옥이 넓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혼자 온 홍콩 출신 여자가 계속 나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해서 서둘러 앞질러서 가버렸는데 후회가 되었다. 같이 갈걸. 겁이 많은 나는 홀로 이 넓은 감옥을 구경하는 게 귀신의 집 구경하는 것과 같았다. 엉엉.
나 돌아갈래~
가족끼리 혹은 같이 온 일행들은 감옥 탐험은 둘째고 눈밭에서 눈싸움하고 눈썰매 타느라 난리들이다. 여행 중 가장 외로운 순간이란 이런 거겠지. 하지만 이왕 돈 내고 표를 끊은 것, 꾸역꾸역 한 건물 씩 클리어하기로 한다.
나눠준 팸플릿을 보면서 가면 쉽다. 예전 아바시리 감옥에서 수시로 탈옥해서 아예 입구를 쓸고 있는 니시가와 토리가치도 만났다. 감옥 안에 탈옥 장면을 재현한 곳도 있다. 대충 둘러보고 나와서 사실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심지어 알고 싶지도 않다. 특히 감방을 구경할 때는 아무도 없는 복도가 너무 무서웠다.
어두운 감방 골목을 보자니 고등학교 때 교실에 도시락을 두고 와 밤중에 홀로 학교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해서 도시락 가져오지 않으면 내일 도시락을 싸주지 않겠다는 엄마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학교에 다시 갔었다. 밤이었는데 낮에는 그렇게 활기찬 학교가 아무도 없는 밤에는 오줌 쌀 정도로 무섭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아무도 없는 불 꺼진 교실 복도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나한테 덮쳐왔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거의 네 발로 기어가면서 오줌 쌀 뻔했다.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 교실에 들어가 내 자리에 걸려 있는 도시락을 들고 나왔던 기억은 지금까지 내가 해본 가장 무서운 체험이었다. 그렇게 학교가 무서우니 학교 괴담이 유행하고 여고괴담이 히트 쳤나 보다.
암튼, 그때만큼은 아니었어도 아무도 없는 감옥은 무서웠다. 특히 더 무서운 건 사람도 아니면서 그때 그 장면을 재현하느라 곳곳에 세워져 있는 인형들이었다. 우씨. 아무도 없는데 나한테 말이라도 걸거나 움직일 것 같아서 계속 힐끔거렸다. 심지어 어느 곳에는 사운드도 흘러나와서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치기도 했다. 이렇게 쫄보라니. 하지만 일행이 있거나 성수기 사람이 많을 때는 들려보면 좋을 곳이다. 볼거리도 많고 당시 죄수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어떤 시설들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또 감옥은 어딜 가든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대충 둘러보고 나와 버스를 타고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감옥 박물관 내린 곳에 버스 시간표가 있으니 시간 맞춰서 가있으면 된다.) 아바시리 역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규동 세트를 먹었다. 어쩐지 아바시리가 주는 느낌이 거칠고 스산하다. 감옥까지 갔다 오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맛집을 찾아 나설 생각도 나지 않아서 보이는 곳에서 먹었는데 맛은 그럭저럭 한 끼 식사로 때울만했다. 먹고 있는데 감옥 입구에서 할인 쿠폰 준 분들을 다시 만났다. 역시 서로 갈만 한 데가 빤하다. 반가운 마음에 가서 말을 붙였다. 유빙을 봤냐고 물었더니 못 봤다고 했다. 대신 기차를 타고 봤다고 한다. 아마 시레토코 샤리로 향하는 '유빙 노롯코호'를 탔나 보다. 나한테도 기차를 권했지만 말은 고맙다고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기차를 다시 탈 생각은 없다. 내일 오전에도 없다면 그대로 다시 삿포로로 갈 예정이다.
식당에서 나와 편의점에 들렀다. 유빙 맥주와 아바시리 화이트 에일 맥주를 샀다. 유빙을 못 볼지도 모르는데 맥주라도 마셔야지. 물론 라면과 과자도 샀다. 오후 다섯 시 밖에 안됐지만 나는 바로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다. 힘들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긴 시간 기차여행과 생각지도 못한 감옥에서 마주한 혼자만의 벅찬 시간 때문에 녹초가 되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딱 일본식 비즈니스호텔이다.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구조다. 짐을 풀었을 때야 나카토노 호텔에 하코다테에서 사둔 이카메시를 두고 온 걸 알았다. 이카메시는 우리나라 오징어순대 같은 것이다. 하코다테 명물이기도 했고 가격도 저렴하고 먹어보고 싶어 사둔 거였다. 갖고 다니다가 상할까 봐 일부러 호텔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그대로 놔두고 왔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단념했겠지만 일본이었다. 예전에 교토 여행할 때 버스에 두고 내린 카메라를 한국에 와서 돌려받은 일이 있다. 그 일을 겪고 나니 일본에서는 함부로 남의 물건을 처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호텔에 메일로 이카메시를 냉장고에 두고 왔고 다시 삿포로로 넘어가는 내일 가지러 가겠다고 보냈다.
이제 맥주를 마셔 볼 시간이다. 후기를 보면 유빙 맥주는 별 맛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색깔은 예쁜 블루빛이다. (어떤 이는 워셔액 같다고도 한다. 쿨럭.) 직접 마셔보니 유빙 맥주는 비주얼이 훌륭한 맥주이지만 맛은 별로 없다. 그저 아바시리 유빙으로 만들었다니 기념으로 한 번 마셔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화이트 에일도 실망스러웠지만 유빙 맥주보다는 맛이 좋았다.
라면과 과자와 맥주를 먹고 마시며 영화를 봤다. 행복한 밤이었다. 감옥 가는 것으로 삽질 하긴 했어도 마무리가 좋으니 된 것이다. 어쩐지 내일은 좋은 하루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