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끝, 아바시리 유빙을 만나다

북해도(北海道) 여행 12

by 볼파란

- 2017년 2월 27일 월요일

오늘은 아바시리 마지막 날이자 유빙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눈을 뜨자마자 홈페이지 들어가서 확인했더니 야호! 있다 있어!! 유빙이 있다. 역시 이러려고 내가 이곳에 왔지. 이러려고 어제 그 삽질을 했지.



숙소에만 있을 수 없어 체크아웃을 하고 짐만 맡겨 둔 채 길을 나선다. 날씨가 끝내준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청명한 날씨 그 자체다. 호텔 뒤편으로 작은 다리가 있어서 그곳에서 아침 산책을 즐겼다. 다리 아래로 보이는 강에 얼음이 둥실둥실 떠내려 온다. 저 얼음이 러시아 강부터 흘러내려온 얼음일까? 커다란 유빙이 점점 작아지고 녹아들면서 이곳까지 떠내려왔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르며 곧 만나게 될 유빙이 더욱 기다려졌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움직였다. 새파란 아바시리 공기가 입안 가득 들어왔다. 가슴이 새파래진 것 같다. 몇몇 주민들이 지나간다.


버스는 바로 역 앞에서 선다. 시간이 되니 하나둘씩 모여든다. 중국인들도 많고 한국 사람들도 많다. 줄을 서서 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어디서 내릴 건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모두 같은 도착지니까.


유빙을 보러 갈 쇄빙선 오로라호


9시 30분 첫 배다. 예약을 하고 왔지만 줄을 서서 예약한 프린트를 보여주면 표를 내준다. 1인 3,300엔이지만 가격이 아깝지는 않다.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어제만 해도 아바시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다들 꼭꼭 숨어 있다가 쇄빙선 타러 한꺼번에 나온 것 같다. 중국 관광객들이 많았다. 그에 못지않게 일본인들도 많았다. 일본인한테도 유빙을 볼 경험은 흔치 않으니까. 배에 올라타자마자 누구랄 것 없이 갑판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는다. 역시 자리싸움에서 밀린다. 다들 버스나 지하철에서 가방 좀 던져봤는지 금세 갑판 위에 자리를 잡고 서있다. 내가 키가 작으니 남자들이 있는 곳은 피해야 했다. 그나마 키가 작은 일본 아주머니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곳에 간신히 끼어들어갔다. ㅠㅠ


갑판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사진을 찍는 건 바다가 아니라 갈매기다. 마치 슈퍼스타처럼 사진 찍으라고 포즈를 취해준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데다가 먹이를 많이 줘서 그런지 가까이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마치 '어서 와, 아바시리 유빙은 처음이지?'라고 여기 주인처럼 으스대는 것 같다.



배 한쪽에는 아바시리 유빙 몇 조각이 놓여있다. 맛을 보고 싶었지만 만져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아바시리 유빙

시간이 되어 배가 출발하고 선착장에 있는 상점들에선 사람들이 나와 일일이 손을 흔들어 준다. 배에 탄 사람들도 한 마음이 되어 손을 흔든다. "잘 다녀올게요"

손을 흔드는 사람들


배는 한 시간 정도 운행한다. 쇄빙선인 배가 유빙을 부수며 나갈 수 있는 곳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찬 바람에 얼굴과 손은 금세 시려졌지만 어느 누구도 내려갈 생각을 안 한다. 하나라도 놓칠까 봐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른다.


이 날씨 실화냐? 정말 청명하다.
어느 순간 뱃전에 유빙 조각들이 와닿는다.
서서히 유빙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바다를 채우는 유빙들


망망대해 같던 바다는 어느 순간 유빙과 만난다. 하나 둘 보이던 유빙 조각들이 바다를 빼곡하게 채울 정도로 많아진다.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동그래지고 입은 벌어진다. 저마다 탄성이 흘러나온다. 쉴 새 없이 셔터 소리가 들려온다.


쇄빙선으로 부수며 지나간 뱃길. 갈매기가 여기까지 따라와 주었다.


배가 나갈수록 커다란 유빙들이 보인다. 유빙은 배가 지나가는 너울에 흔들리고 쪼개어진다. 유빙 조각들이 바다를 덮은 풍경은 마치 사막 같아 보인다. 모래사막이 아니라 하얀 설빙으로 이루어진 사막이다. 발을 디디면 기적을 행한 예수처럼 걸어갈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생각조차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도 신기루인가. 참 멀리도 왔구나. 기대했던 유빙 앞에 왔어도 변한 것은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극적으로 끝을 맺을 수도 없다. 삶이란 내가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순간 또한 내 삶의 무수히 지나가는 장면들 속에 하나일 뿐이리라. 담담하게 유빙을 바라보며 이제 내 여행이 끝나감을 실감했다. 여기까지 와줘서, 올 수 있어서, 수고했고, 즐거웠어!



유유히 흘러가는 오로라 쇄빙선
유빙을 부수며 나가는 오로라호


한참을 구경하고 몸이 꽁꽁 얼어서야 밑으로 내려왔다. 아래층 선실에는 가족단위나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앉아 유빙이 떠내려온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편의점에 간단한 먹거리나 기념품, 맥주 등이 팔지만 이미 어젯밤 유빙 맥주를 마신 데다가 별로 먹고 싶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쉬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팔고 있는 기념품. 저 오로라 배는 사고 싶었다.


배가 도착하고 사람들은 유빙의 여운을 안고 뿔뿔이 흩어진다. 중국 관광객들은 대부분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온 모양이다. 아침도 간단히 먹은 데다가 조금 이른 점심을 먹을까 싶은데 아무리 봐도 선착장 근처에는 먹을 곳이 없어 보였다. 검색해서 찾아가 볼까 싶은데 마침 역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아무래도 역 근처가 편하지 싶어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왔다. 오늘은 어제 먹은 규동 집 건너편으로 가본다. 빅토리아라는 스테이크 레스토랑이다. 사실 아바시리 역 근처는 어제 먹은 규동 집과 이곳 말고는 딱히 없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 무척 맛있다!! 어제도 여길 왔어야 했다. 직원분도 친절하고 어제에 비해 날씨도 너무 좋았다. 햇살이 가득한 자리에 앉아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었다.


월요일의 메뉴


메뉴는 요일별로 다른 것 같았고 각각 메뉴도 세트를 어떻게 시키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나는 1번 메뉴에 카레밥과 수프 세트로 시켰다. 가격도 저렴했고 나오는 스테이크 말고는 밥과 카레와 수프는 샐러드바에서 직접 가져와 먹으면 된다.


나온 메뉴. 밥양 실패.


배가 고파서 밥양 조절은 실패했지만 맛은 최고였다. 함박스테이크는 겉은 바삭하고 안은 육즙이 촉촉했다. 너무 맛있다! 배가 불렀지만 싹싹 다 비웠다. 호텔에 돌아가기 전에 아침 산책길을 다시 둘러봤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오늘 날씨로 인해 긴 여행의 피곤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보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삶을 여행같이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오감이 깨어나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게 해주는 건 여행이 주는 기쁨의 순간이다.



아바시리에 온 건 잘한 일이다.


보정 하나 없이 그날의 아바시리 하늘에 글씨 하나 얹혔을 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