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같은 삶
충북교육도서관에서 열린 강연에 다녀왔다. 한 달 전에 신청해 둔 자리였는데 이제야 당첨 소식을 받았다. '퇴근길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매달 한 번씩 평일 저녁에 인문학 분야의 명사를 초청해 강연을 진행한다고 한다. 올해 1월부터 시작한 프로그램이라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신청해 본 결과 다행히도 이번에 당첨되었다.
강사는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의 최수철 교수님이었다. 40년간 실존문학을 연구하신 분으로, 이방인 번역가이자 카뮈 연구원, 저술가로 활동 중인 분이라고 한다. 이방인의 팬인 나로서는 기대되는 자리였다. 교수님은 박사학위를 받고 수십 년간 연구한 끝에 20년 정도 지나서야 실존 문학을 조금 알고 논할 수 있게 되었다며, 본인만 믿고 두 시간을 따라오라는 인사말을 전하셨다.
교수님은 물의 수위에 책을 비유하셨다. 얕은 물에서만 놀고 싶으면 쉬운 책을 읽고, 깊은 물에서 놀고 싶으면 깊은 책을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장편소설은 세 권밖에 쓰지 않았기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책 ‘페스트’는 발목 수준, ‘이방인’은 가슴까지, ‘전락’은 머리까지 차오른다는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다.
이번 강연에서 다룰 '이방인'은 줄거리로 이해하면 안 되는 소설이라고 하셨다. 완벽한 부조리 소설, 실존주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조리는 사회적 부조리가 아닌 이해할 수 없고 비이성적인 것을 의미한다.
카뮈는 1913년 생으로, 백인이지만 알제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검은 발'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극빈의 환경에서 살았고, 폐병으로 평생 고생했으며 여성 편력이 있었지만, 의지와 총명함으로 삶을 이끌어 나갔다. 그의 미완성 유작 '최초의 인간'과 초기작 '이방인'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책이다.
'이방인'이 많은 블로그에서 엉터리로 해석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줄거리만 보면 아주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머니 의견을 존중하고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삶과 죽음에 있어서 동양(불교) 철학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이 소설은 상징으로 시작해서 상징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모든 단락, 문장, 단어들이 100% 실존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줄거리를 겉으로만 보면 엉터리가 되어버린다.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는가?
교수님은 도덕, 관습, 전통, 규율에 따라 사는 삶은 실존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문학사 최고의 첫 문장으로 거론될 정도로 논란이 많다. [엄마가 죽었다.] 어머니도 아니고 엄마라고 한 것조차 상징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꼭 엄마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것도 사회적인 관습이라는 것이다. [날짜는 중요하지 않다.] 날짜 역시 인간 존재의 편의성을 위해서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어머니의 나이를 모르는 주인공.] 나이 역시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숫자 개념을 붙인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엄마가 죽은 것이고, 나머지 정보는 그저 관습일 뿐이다. 이러한 그를 남들은 무대에서 날뛰는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 보통은 연출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요양원장의 악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어머니의 시신 확인도 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절차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세상은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세상을 명징하게 선택하는 것이 주인공 뫼르소의 삶의 자세다. 주변 인물 중 장례식 관리자나 애인 마리 정도만 실존주의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운구할 때 아스팔트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뫼르소의 잠재된 실존주의가 깨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점장의 인사이동 제의를 거절한 것도 외부 조건을 변경시키는 것이 본인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 주인공의 큰 결정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실존을 흔드는 것에 반발한다. 오후에 눅눅해지는 타월을 싫어하고, 싫다 좋다 선택하는 것을 꺼린다.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한다.
우리는 사실 남들이 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자아를 찾고, 모험을 하고, 자유를 찾고, 찾은 사람과 더불어 책임 있는 세상을 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사실 니체의 철학에서 연결되며, 그것이 완벽한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 '이방인'이다.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
인간은 무의 상태로 태어난다. 늑대굴에서 태어난 인간은 늑대가 되어버린다. 실존적으로 인간은 인간 사회에 살면서 인간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 없이 태어난다. 완벽한 자유, 즉 무시무시한 자유에 대해서 대부분의 인간은 공포를 느낀다. 본질을 원하기 때문이다. 신, 철학, 관습에 기대며 사회의 일부분으로 톱니바퀴가 되어 살기를 선택한다. 사실 세상에 따라야 할 본질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자유라는 저주를 받았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유가 있지만, 다만 약해지고, 타협하고, 세상의 맥락에 맞춰 산다. 인간은 사실 육체적인 덩어리고 본질이 없다. 살면서 본질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불교 철학에서 말하듯 인생은 '공'이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총합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 말로 강연은 끝이 났다.
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한 강연이었다. 실존주의를 조금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조금 이해한 것 같다.
내 소설 주인공의 성격과 가치관을 완전한 실존주의자로 설정하기로 결심했다. 비록 사회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겠지만,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모습을 그려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