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선다는 것의 물질성

by 부소유

신부님은 한 달 전에 제출했던 강론 원고를 첫 줄부터 다시 썼다고 했다. 복음말씀에 있던 ’ 업신여김‘이라는 단어 하나가 자신의 내면에 쌓인 더러움을 건드렸고, 그것을 솔직히 풀어놓았다가, 다시 적당히 감추면서 다시 썼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텍스트가 어떻게 물질이 되는지를 생각했다. 글이란 것이 단지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손끝과 키보드를 거쳐, 화면에 박히고, 종이에 인쇄되고, 목소리로 진동하며, 결국 누군가의 고막을 때리고 뇌세포를 흔드는 일련의 물리적 사건이라는 것을. 신부님이 원고를 다시 쓴 것은 단순히 생각을 바꾼 게 아니라, 그 텍스트가 만들어낼 물질적 파장, 교우들의 불편함, 공기 중의 미묘한 긴장, 예배당 안의 분위기를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업신여김. 그 단어는 공중에 떠 있지 않았다. 신부님은 자신이 여러 사람을 업신여기고 살았다는 것을,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습관이란 신경회로의 반복이고, 뉴런과 시냅스의 강화이며, 몸에 새겨진 패턴이다. 우리는 흔히 업신여김을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실은 몸의 문제였다. 누군가를 볼 때마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눈빛의 각도, 입꼬리의 미세한 움직임, 목소리의 톤, 심장박동의 변화.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방의 몸도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미세한 근육의 수축, 땀샘의 활성화, 코르티솔의 분비. 업신여김은 두 몸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이었고, 그 화학작용은 다시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증폭되고 순환했다.


신부님은 말했다.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나만 업신여기는 게 아니라, 저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고, 우리는 서로를 업신여긴다고. 이것은 단순한 상호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생태계였다. 업신여김이라는 정서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며, 공동체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 마치 숲 속의 나무들이 뿌리를 통해 양분과 신호를 주고받듯이, 우리는 시선과 말과 침묵을 통해 감정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교환은 늘 불균등했다. 누군가는 더 많이 주고, 누군가는 더 많이 받았으며, 그 차이가 위계를 만들고, 위계가 다시 업신여김을 생산했다.


그런데 신부님은 지금 시대에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했다. 더 이상 동맹은 없고, 각국의 이익만 있다고. 미국 대통령을 예로 들며,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인용했다. 그것은 비단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나는 여기서 묘한 역설을 발견했다. 신부님은 고립의 시대를 예언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트럼프의 정책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반도체 시장의 변동이 한 가정의 미래를 결정하고, AI 기업들의 경쟁이 수요와 공급의 곡선을 바꾸며, 그것이 다시 우리 아이들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는 것. 우리는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한 망 속에 엮여 있었다.


신부님은 한 아이에게 물었다. 반도체가 얼마나 오래 잘 나갈 것 같으냐고. 아이는 10년이라고 답했고, 신부님은 5년이라고 생각했다. 그 차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를 보는 두 개의 시간 감각이었다. 아이의 10년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었고, 신부님의 5년은 시장의 포화와 독과점의 필연성을 읽는 현실주의였다. 1등 기업만 살아남는다는 신부님의 예측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차이를 소거하고 획일성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수많은 AI 기업들이 경쟁하지만, 결국 대장들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되거나 흡수된다. 그것은 생물학적 자연선택이 아니라, 자본과 기술과 권력의 집중이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니 혼자 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신부님은 말했다. 업신여길 틈이 없다고.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쏟을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역설적으로 관계의 본질을 생각했다. 혼자 선다는 것은 타인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를 다르게 맺는 방식이었다. 업신여김이라는 에너지 소모적인 관계 대신, 각자가 자기 자신과 단단하게 연결되는 것. 그리고 그 단단함을 바탕으로 타인과 만나는 것. 신부님이 말한 외로움을 준비하라는 선배 신부들의 조언도 같은 맥락이었다. 외로움이란 관계의 부재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 변화하는 것을 견디는 힘이었다.


신부님은 성당에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 밥을 먹다가 세 번, 두 번, 한 번으로 줄고, 어떤 주간에는 아무도 안 찾아오는 날도 있을 거라고. 미국처럼, 유럽처럼. 나는 여기서 종교 공동체의 쇠퇴가 단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물질적 조건의 변화임을 읽었다. 사람들이 바빠지고, 경제적 압박이 커지고,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온라인 커뮤니티가 오프라인을 대체하면서, 성당은 점점 텅 비어갔다. 그것은 마치 강이 말라가듯, 숲이 사막으로 변하듯, 하나의 생태계가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신부님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신부님은 보좌 신부 시절부터 그것을 준비해 왔다고 했다. 동기 신부 네 분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고. ‘최 신부, 외로움을 준비해.’ 그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랐고,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외로움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인정과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연습이었다. 스스로 우뚝 서는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추상적인 정신력이 아니라, 매일의 실천 속에서 단련되는 구체적인 능력이었다. 혼자 밥을 먹는 법, 혼자 산책하는 법, 혼자 생각하는 법, 혼자 기도하는 법. 그것은 고립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다.


신부님은 말했다. 젊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연세 드신 분들도, 가족들에게,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느낄 때도. 업신여길 시간이 없다고. 혼자 서는 연습을 더 해야 한다고. 나는 이 말에서 세대와 계층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과제를 읽었다. 청년은 취업과 경쟁의 압박 속에서, 중년은 생계와 노후의 불안 속에서, 노년은 쇠약과 소외의 두려움 속에서, 각자 업신여김과 비교의 늪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은, 비교를 멈추는 것이었다. 비교는 늘 위계를 전제했고, 위계는 늘 폭력을 낳았다.


강론을 들으며 나는 창밖을 보았다. 가을 햇살이 성당 마당의 은행나무를 비추고 있었다. 노란 은행잎들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 잎들은 나무와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나무의 일부였다. 땅으로 떨어져 썩으면서 다시 양분이 되어 나무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개체와 전체의 경계는 늘 모호했다. 우리는 혼자 서는 법을 배우면서도, 동시에 더 큰 순환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신부님이 말한 혼자 서기는, 그래서 단절이 아니라 관계 맺기의 다른 방식이었다. 업신여김이라는 소모적 관계에서 벗어나,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 뿌리를 통해 서로에게 양분을 주고받는 것.


신부님은 두 달 동안 이 강론을 준비했다고 했다. 한 달 전에 원고를 내고, 한 달을 더 기다리며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다고. 그 시간 동안 텍스트는 변했고, 생각은 익어갔으며, 말씀은 몸이 되었다. 강론이란 것이 단지 교리의 전달이 아니라, 삶의 질료를 언어로 빚어내는 작업임을 깨달았다. 업신여김이라는 감정의 쓰레기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더러움을 마주하고, 그것을 적당히 포장하되 진실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그 과정에서 신부님은 단지 강론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씨름했다.


나는 성당을 나서며 생각했다. 우리는 이제 혼자 서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동맹도 공동체도 약해지고, 각자도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하지만 혼자 선다는 것은 결코 홀로 있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무게 중심을 찾아, 흔들리지 않고 서서, 바람과 빛과 대지와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은행나무가 가을바람에도 뿌리를 내리고 서 있듯이,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 뿌리는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뿌리들과 얽혀 있을 것이었다.


업신여길 시간이 없다는 신부님의 말은, 그래서 단순한 포기나 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너지의 재분배였다. 타인을 판단하고 비교하는 데 쓰던 에너지를, 자기 자신을 세우는 데 쓰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각자가 만나는 관계는, 업신여김의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완전함을 인정하는 관계일 것이었다. 신부님은 아직 그 준비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미완성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의 증거였다. 우리는 평생 배우고, 평생 준비하며, 평생 되어가는 존재들이었다. 혼자 서는 법도, 외로움을 견디는 법도, 결국은 끝없는 되어감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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