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의 병

by 부소유

신학교 1학년 때 경남 산청의 한센병 요양소에서 봉사활동을 하셨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오래 맴돈다. 나병의 가장 큰 특징이 무감각이라는 것, 그 감각의 상실이 결국 더 큰 상처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내 존재의 바닥을 건드린다. 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신경의 문제가 아니다. 상처를 입고도 모르는 것, 썩어가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실존적 무감각이 아닌가.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이 무뎌진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치 당뇨 환자가 발이 썩어가는 것을 모르듯이.


신부님은 죄의 특징이 나병과 닮았다고 하셨다. 긴 잠복기, 무감각, 그리고 영구적 손상. 이 세 가지는 곧 인간 실존의 비극적 조건들이다. 우리는 모두 병든 자들이다. 다만 그 병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5년에서 20년의 잠복기라니.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작은 죄들, 작은 거짓말들, 작은 외면들이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병변으로 드러날 때까지 나는 건강한 줄로만 알고 살아갈 것이다. 무감각의 가장 무서운 점은 감사할 줄 모르고 미안해할 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고친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단 한 명만이 돌아와 감사했다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치유받은 것조차 제대로 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매일의 기적들, 숨 쉬는 것, 걷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이 모든 것들에 무감각해진 채 살아간다.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역정을 낸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뼈아프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초상이 아닌가. 우리는 모두 자기 합리화의 달인들이다. 내 잘못을 지적받으면 방어기제가 먼저 작동한다. 변명이 앞서고, 남 탓이 튀어나온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무감각 상태다. 사실 영구적 손상이라는 마지막 특징이 가장 무겁다. 한센병 환자들의 무너진 코, 잘려나간 손가락처럼, 우리가 타인에게 남긴 상처들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관계의 단절, 신뢰의 파괴, 사랑의 종말. 이런 것들은 한 번 일어나면 되돌릴 수 없다. 사르트르가 말한 '타인은 지옥'이라는 명제가 여기서 실현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지옥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 지옥을 만들어가는 과정조차 감각하지 못한다.


신부님은 몸이 아프면 병원으로, 영혼이 아프면 영혼의 병원인 고해성사로 오라고 하셨다. 전문가를 만나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고해성사만으로 충분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각성이 아닐까. 무감각에서 깨어나는 것, 잠복기의 안개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 내가 짓고 있는 작은 죄들을 직시하는 것. 실존은 선택이다. 매 순간 우리는 감각하기를 선택하거나 무감각하기를 선택한다. 상처 입히기를 선택하거나 치유하기를 선택한다. 나는 오늘 무엇을 선택했는가. 내일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러나 동시에 이 물음이야말로 나를 인간으로 만든다. 병든 자이지만 자각할 수 있는 자, 죄인이지만 회개할 수 있는 자, 무감각하지만 다시 감각을 되찾을 수 있는 자.


경남 산청의 한센병 요양소는 멀리 있지 않다. 그곳은 바로 여기,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 우리 모두가 환자이자 간병인이며, 죄인이자 구원자다. 이 역설적 진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치유는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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