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그리고 변영주

책을 덮고 삶을 열자!

by 부소유

평일 저녁, 창비 본사에서 약 한시간 반 동안 진행된 정혜윤 작가의 신간 <책을 덮고 삶을 열다> 북토크는 책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떻게 삶의 방식이 되는지를 보여준 귀한 시간이었다. 특히 변영주 영화감독이 사회를 맡아 두 예술가의 깊이 있는 대화가 펼쳐졌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정혜윤 작가는 CBS 라디오 PD로,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를 비롯해 재난 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여러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그녀의 신간 <책을 덮고 삶을 열다>는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삶의 발명>에 이은 작품으로, 세 권이 마치 삼부작처럼 서로 묻고 답하며 연결되어 있다는 변영주 감독의 평가가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방식 그 자체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존재 방식을 찾으며 살아간다. 선생이거나, 감독이거나, 편집장이거나.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헷갈린다. 이것이 정말 내 길인가, 계속할 것인가, 바꿀 것인가. 카프카의 시집 제목처럼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 망설임의 순간마다 정혜윤 작가에게는 책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지만 살아남은 경험을 이야기하며, 거의 죽을 뻔한 것과 진짜 죽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라고 말한 부분이었다. 그 간발의 차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책을 덮고 삶을 열다’였다. 이미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정혜윤 작가의 독서 방식은 독특하다. 그녀는 책을 한 번에 다 읽지 않는다. 천천히, 조금씩, 문장 하나하나를 읽는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고 했다. 보통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책에서는 가장 좋은 의미라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 아래 거대한 빙산이 있을 수 있다. “나 오늘 보고 싶었어”라는 말의 깊이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은 그 빙산의 깊이다. 이 문장이 어디서 끌려왔는지, 그 깊이가 보일 때 그녀는 멈춘다.


독서의 세 단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읽기, 멈춤, 딴 생각. 너무 좋은 표현을 만났을 때 멈추고, 약간의 딴 생각이 들어온다. “왜 나는 이런 걸 못 쓰지” 같은 자아의 침입이기도 하고, “저런 별 나도 봤는데, 저런 생각 나도 해봤는데” 같은 공명이기도 하다. 그 멍한 순간, 그 딴 생각이 너무 좋다고 했다. 이 세 단계가 없으면 그냥 잡지 보는 것과 똑같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우리는 호기심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지만, 진짜 독서는 그 깊이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작가의 세계를 함께 가보려 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우리를 멈추게 한다.


첫 번째 챕터가 이작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과 쿠르베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변영주 감독은 <바베트의 만찬>을 여성이 자기 욕망을 물질화해 예술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탐닉하는 영화로 읽어냈다고 했다. 한국에서 개봉했을 때 단순히 음식 영화로만 소비되었지만, 사실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유와 움직이는 손이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정혜윤 작가는 이 챕터를 통해 “내 손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장벽을 만난다. 그것이 바로 손이다. 무엇을 하든 클릭으로 평가된다. 조회수가 얼마나 나오는지, 시청률이 어떤지가 실시간으로 나온다. 라디오 PD인 그녀도 유튜브 시대에 먹힐 것 같은 주제를 고민하게 된다. 여성주의적 이야기, 생태적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눈치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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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은 이방인의 뫼르소 처럼 살고 있습니다. 싯다르타 처럼 속세를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은 호밀밭의 홀든 콜필드 랍니다. 뭐 그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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