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by 부소유

은지는 서울역 근처 카페에서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3년 만의 만남이었다. 준호가 해외 연수를 다녀온 후 처음이었다. 카페 매니저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러 호주에 갔다 왔다고 했다. 은지는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준호가 들어왔다.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오만함도, 무너진 후의 초췌함도 없었다. 대신 차분하고 단단해 보였다.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있었고, 손은 거칠어져 있었다. 노동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준호가 은지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 오랜만이네. 작가님 되신 거 축하해.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준호가 자신이 내린 커피를 내밀었다. - 호주에서 배운 방식이야. 한번 마셔봐. 은지가 한 모금 마시자 향이 깊었다. 준호가 설명했다. - 원두부터 다르게 접근했어. 각 지역의 토양과 기후가 커피 맛을 결정하거든. 반지하와 13층이 다르듯이 말이야. 은지는 놀랐다. 준호가 반지하를 언급하다니. 예전의 준호라면 절대 하지 않을 비유였다. 준호가 계속 말했다. - 책 읽었어. ‘반지하의 빛’. 세 번 읽었어. 읽을 때마다 다르게 보였어. 처음엔 불편했고, 두 번째는 미안했고, 세 번째는 이해가 됐어.


준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호주에서의 2년은 완전히 바닥에서 시작하는 시간이었다고. 언어도 서툴고, 돈도 없고,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곳. 농장에서 일하고, 카페에서 설거지하고, 새벽 시장에서 물건을 날랐다. - 처음으로 최저시급 받으며 일했어. 하루 12시간씩. 손가락이 다 갈라졌어. 그러면서도 준호의 표정은 밝았다. - 근데 이상하게 행복했어. 내 노동으로 번 돈으로 밥 먹고, 커피 공부하고. 누구의 손자도 아니고, 서울대생도 아니고, 그냥 준호로 사는 거. 은지는 준호의 변화가 진짜라는 것을 느꼈다.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진부한 진리를 준호가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준호가 사진을 보여줬다. 호주 카페에서 일하는 모습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옆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 여기서는 아무도 내 학벌을 묻지 않았어. 그냥 커피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만 중요했어.


은지가 -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 하고 물었다. 준호가 - 작은 카페를 열려고. 대출받아서. 프랜차이즈 말고 독립 카페. 동네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곳. 은지가 - 어디에? 준호가 웃으며 - 너가 살던 동네. 반지하 많은 그 동네. 거기 사람들도 좋은 커피 마실 권리가 있잖아. 은지는 감동했다. 준호가 자신들의 동네를 선택하다니. 예전에는 무시하고 외면했던 그곳을. 준호가 - 사실 엄마도 이제 그 근처 살아. 이혼 후 계속 작은 집으로 이사했거든. 이제는 반지하는 아니지만 비슷한 처지야.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


고모의 근황을 물었다. 준호가 - 많이 건강해지셨어. 백화점 일은 그만두고 지금은 동네 마트에서 일하셔. 힘들지만 만족하신대.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사는 거라고. 은지는 고모도 변했구나 생각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준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 누나, 할머니 얘기 하고 싶어. 책에서 읽었지만, 직접 듣고 싶어. 할머니가 왜 그렇게 차별했을까? 은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 모르겠어. 아마 할머니도 몰랐을 거야. 그냥 그게 당연하다고 배웠겠지. 아들이 딸보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중요하다고. 준호가 고개를 숙였다. - 난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미안하네. 은지가 - 이제 와서 미안해해도 과거가 바뀌진 않아. 하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지. 너도, 나도.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맑았다. - 맞아. 그래서 열심히 살려고. 내 방식대로, 정직하게.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걸었다. 서울역에서 남대문 시장까지. 준호가 - 여기서 원두 공급업체를 찾고 있어. 공정무역 하는 곳으로. 은지가 - 비싸지 않아? 준호가 - 비싸도 해야 해. 착취 없는 커피를 팔고 싶어. 시장을 걸으며 준호는 여러 가게를 들여다봤다. 진지하게 가격을 묻고, 메모하고, 명함을 받았다. 은지는 이런 준호가 낯설면서도 대견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모습이었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된 준호.


점심을 먹으러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백반집이었다. 6천 원짜리 정식. 준호가 - 이런 데가 진짜 맛있어. 호주에서 한국 음식 그리울 때 이런 백반 생각났어. 두 사람은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을 먹었다. 준호는 밥을 한 톨도 남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준호가 말했다. - 내 카페 첫 손님 되어줄래? 내년 봄에 오픈 예정이야. 은지가 - 당연하지. 축하화환도 보낼게. 준호가 - 화환은 됐고, 그냥 와서 커피 마셔줘. 내가 제일 잘 내린 걸로 대접할게.


헤어지기 전 준호가 물었다. - 요즘 행복해? 은지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해. 너는? 준호가 웃었다. - 나도. 처음으로 내 삶을 사는 것 같아.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내 것이야.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은지는 준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출발점은 달랐지만 결국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자신의 노동으로 사는 삶. 작지만 정직한 삶. 반지하와 13층의 거리는 여전히 있지만, 이제 그들은 같은 높이에서 마주 볼 수 있었다.


오늘 준호를 만났다. 온실 속 화초였던 그가 거친 땅에 뿌리를 내렸다. 우리는 서로에게 했던 상처를 인정하고, 용서는 아니지만 이해에 도달했다. 이것이 성장인가. 증오를 딛고 연민에 이르는 것. 차별을 넘어 연대에 이르는 것.


그리고 소설의 첫 문장을 썼다. ‘두 사촌이 있었다. 한 명은 반지하에서, 한 명은 13층에서 자랐다. 30년 후 그들은 같은 높이에서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은지는 이 이야기를 끝까지 써보기로 했다. 준호와 자신의 이야기를, 상처와 성장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