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아버지가 30년간 다니던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은퇴했다. 예순 살. 정년이었다. 마지막 출근 날 아침, 아버지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거울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하얗게 센 머리, 깊게 패인 주름, 구부러진 어깨. 30년의 시간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낡은 작업복을 입고 현관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은지는 조용히 지켜봤다.
관리사무소에서 작은 송별식이 있었다. 은지와 어머니, 민수가 참석했다. 직원들이 꽃다발과 상패를 준비했다. ‘30년 근속 공로패’.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받았다.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 김영수 소장은 정말 성실한 직원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무단결근이 없었죠. 새벽에 나와서 밤늦게까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짧게 답사를 했다. - 30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부족한 사람인데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멈췄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 가족 먹여 살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뿐이었다. 화려한 업적도, 자랑할 만한 성과도 없었다. 그저 매일 성실하게 일한 것. 그것이 아버지의 30년이었다. 퇴직금은 3천만 원이었다. 큰돈처럼 보였지만 30년을 일한 대가치고는 적었다. 한 해에 100만 원. 한 달에 8만 원. 하루에 3천 원. 아버지의 30년을 이렇게 계산하니 서글펐다. 하지만 아버지는 만족스러워했다. - 이 정도면 충분해. 할머니 유산도 있고, 이제 집도 옮겼고.
1년 전, 가족은 드디어 반지하를 벗어났다. 할머니 유산과 아버지의 대출로 작은 빌라 2층을 전세로 구했다. 20평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반지하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햇빛이 들어왔고, 습기가 없었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불었다. 30년 만의 지상 생활이었다.
은퇴 후 첫날, 아버지는 늦잠을 잤다. 평생 새벽 5시에 일어났던 사람이 8시까지 잤다. 어머니가 - 당신, 일어나야지, 하고 깨우려 하자 은지가 말렸다. - 아빠 좀 더 주무시게 둬요. 30년 만에 늦잠이에요.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일어나 거실로 나왔을 때,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수가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아빠 은퇴 축하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놀라며 - 이게 뭐야? 민수가 - 제가 샀어요. 첫 월급으로. 대학 졸업하고 취직한 민수의 첫 선물이었다.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은퇴 후 아버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30년 동안 일만 했던 사람에게 갑작스러운 자유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처음 며칠은 TV만 봤다. 뉴스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스포츠를 봤다. 하지만 금세 지루해했다. 손에 익은 일이 없으니 불안해 보였다. 어머니가 제안했다. - 당신, 운동이라도 다녀요. 동네 공원에서 걷기라도. 아버지가 망설이다가 운동복을 입고 나갔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평일 낮에 공원을 걷는 것이 죄책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같은 처지의 은퇴자들을 만났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때로는 막걸리도 한잔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 나도 뭔가 하고 싶어. 놀고만 있으니 미안해서. 은지가 - 아빠, 30년 일했잖아요. 이제 쉬어도 돼요. 아버지가 - 아직 건강한데 놀 수만은 없지. 뭐라도 해야 해. 어머니가 - 그럼 텃밭이라도 가꿔보는 건 어때요? 구청에서 분양한대요. 아버지는 텃밭을 신청했다. 동네 산자락의 작은 텃밭이었다. 3평 정도의 작은 땅이었지만 아버지는 열심히 가꿨다. 상추, 고추, 토마토를 심었다. 매일 아침 물을 주러 갔다. 싹이 트고, 잎이 나고, 열매가 맺는 것을 지켜봤다. 생명을 기르는 일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한 것 같았다.
여름이 되자 텃밭은 푸르렀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수확한 채소를 들고 왔다. - 내가 기른 거야. 농약 안 쳤어. 어머니가 그 채소로 반찬을 만들었다. 온 가족이 모여 먹었다. 상추쌈에 된장을 발라 먹으며 아버지가 - 이게 진짜 맛이지, 하고 흐뭇해했다.
가을, 아버지는 손자 소식을 들었다. 아니, 손녀였다. 민수가 결혼한 지 1년 만이었다. 민수가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 아빠, 할아버지 되신 거 축하드려요. 아버지가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흐릿한 형체였지만 생명이었다. - 할아버지라... 내가 할아버지가 되다니.
아버지는 달라졌다. 아기용품을 구경하러 다녔다. 백화점 유아용품 코너를 서성거렸다. 작은 옷들, 신발들, 장난감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가 - 당신, 너무 일찍 사는 거 아니에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 그래도 준비해야지. 처음이잖아. 은지는 아버지의 변화를 지켜봤다. 30년 동안 가족을 위해서만 살았던 아버지가 이제야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책도 읽기 시작했다. 은지의 책을 제일 먼저 읽었다. - 우리 딸이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몰랐네. 미안하다. 사는동안 더 관심 가져주지 못해서. 아버지는 은지의 작업실에도 찾아왔다. - 여기서 글 쓰는구나. 좋네. 햇빛도 잘 들고.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나도 뭔가 써볼 수 있을까? 은지가 놀라 - 아빠도 쓰고 싶은 게 있어요? 아버지가 쑥스럽게 - 그냥... 사는 동안 있었던 일들.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은지는 아버지에게 노트를 선물했다. - 아빠, 이거 일기장이에요. 매일 조금씩 써보세요. 아버지는 그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맞춤법도 틀리면서, 하지만 정성스럽게 썼다. 지난 기억을 하나씩 꺼내 기록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은지에게 일기장을 보여줬다. 한 페이지를 가리키며 - 이거 읽어봐. 은지가 읽었다.
‘1987년 겨울, 은지가 태어났다. 병원비가 없어서 어머니가 집에서 낳을 뻔했다. 다행히 동료가 돈을 빌려줘서 병원에 갈 수 있었다. 딸이지만 예뻤다. 아들이 아니라서 어머니(할머니)는 실망했지만, 나는 좋았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은지는 눈물이 났다. 아버지도 자신의 탄생을 기뻐했구나. 비록 표현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돈 없고, 능력 없는 아빠라서. 은지가 아버지를 안았다. - 아빠, 충분했어요. 아빠가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크리스마스 무렵, 손녀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아기를 봤다. 작고 빨간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 우리 강아지 같네, 하며 웃었다. 민수가 - 아빠, 강아지라니요! 하며 웃었다. 온 가족이 웃었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날 밤 아버지의 일기는 다음과 같았다. ‘오늘 손녀를 봤다. 새 생명이다. 이 아이는 반지하를 모르고 자랄 것이다. 차별도 모르고, 가난도 모르고. 그렇게 키우고 싶다. 내가 할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것. 그저 사랑하는 것. 조건 없이.’
아버지의 일기를 읽으며 생각했다. 아버지도 글을 쓰고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것도 일종의 문학이 아닐까. 성실함의 기록. 그 안에도 빛이 있다. 반지하를 견딘 아버지만의 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