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육십 번째 생일을 맞았다. 환갑이었지만 큰 잔치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가족끼리 조촐하게 모였다. 은지가 예약한 한정식집에서 어머니, 아버지, 은지, 민수 부부, 그리고 갓 돌이 지난 손녀가 함께했다. 어머니는 한복을 입었다. 연분홍색 저고리와 회색 치마. 수수하지만 품위가 있었다. 식사를 하던 중 민수가 말했다. - 엄마, 이제 파출부 일 그만두니 편하시죠?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 그럼, 이제야 내 시간이 생겼어. 아버지의 은퇴 후 어머니도 일을 그만두었다. 30년간의 파출부 생활이 끝났다. 남의 집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던 삶이 마감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니가 은지를 불렀다. - 은지야, 엄마가 할 얘기가 있어. 둘만 있을 때 하고 싶었는데. 은지는 어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옷장 깊숙한 곳에서 낡은 상자를 꺼냈다. 먼지가 쌓인 종이 상자였다.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열자 안에는 누런 서류들과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사진 한 장을 들어 보였다. 젊은 여성이 책을 들고 있는 흑백사진이었다. - 이게 나야. 스물한 살 때. 은지는 놀랐다. 사진 속 어머니는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적이고 당당해 보였다. 지금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 대학생때야. 은지는 충격을 받았다. - 엄마가요? 대학을?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 지방의 작은 대학이었지만 국문학과에 다녔어. 2학년까지. 은지는 믿을 수 없었다. 평생 어머니를 무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또 다른 종이를 꺼냈다. 대학 성적표였다. 1978년, 1979년 도장이 찍혀 있었다. 성적은 거의 A였다. 어머니가 씁쓸하게 웃었다. - 공부를 좋아했어. 시를 쓰고 싶었지. 그때는 문학소녀였거든. 은지가 - 그런데 왜 그만두셨어요?
어머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어.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셨거든. 빚더미에 앉았지. 오빠들은 군대에 있었고, 동생들은 어렸고. 내가 일해야 했어.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지. 공장에서 일하다가 너희 아빠를 만났어. 은지는 가슴이 먹먹했다. 어머니도 꿈이 있었구나. 문학을 하고 싶어 했구나. 그런데 가족을 위해 포기했구나. 어머니가 계속 말했다. - 아빠한테도 말 안 했어. 부끄러워서. 대학 중퇴자가 고졸이랑 결혼했다고 하면 아빠가 기죽을까 봐.
어머니가 상자에서 노트를 꺼냈다. 오래된 일기장이었다. - 이건 내가 쓰던 시 노트야. 은지가 펼쳐보니 빛바랜 종이에 어머니의 젊은 글씨가 빼곡했다. 시들이었다. ‘빨래하는 여자’, ‘공장의 새벽’, ‘고향 가는 길’. 서툴지만 진솔한 시들이었다.
은지가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손이 트는 계절 / 찬물에 빨래를 한다 / 누군가의 옷에서 / 내 청춘이 빠져나간다 / 붉은 피처럼 / 물이 들고 / 물이 빠진다’ 은지는 눈물이 났다. 이것이 어머니의 삶이었구나. 시가 되지 못한 삶.
어머니가 - 은지야, 엄마가 왜 이 얘기를 하는지 알아? 너한테 미안해서야. 엄마가 더 많이 배웠으면 너를 더 잘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은지가 - 엄마, 무슨 소리예요. 엄마가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나는 네가 글 쓰는 걸 보면서 늘 생각했어. 내가 못 이룬 꿈을 네가 이루는구나. 어머니가 또 다른 것을 꺼냈다. 은행 통장이었다. - 이건 엄마가 30년 동안 모은 거야. 파출부 일하면서 조금씩 모았어. 3천만 원 있어. 은지가 놀라 - 엄마, 이걸 왜 저한테. 어머니가 - 네가 가져. 글 쓰는 데 보태. 작가는 돈 걱정 없이 써야 좋은 글이 나와. 은지는 통장을 돌려드리려 했지만 어머니가 완강했다. - 이게 엄마의 소원이야. 네가 계속 글을 쓰는 거. 엄마가 못 쓴 글까지 네가 써주는 거. 은지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 어머니도 울었다. 서로의 눈물이 섞였다. 어머니가 말했다. - 그리고 하나 더. 엄마도 다시 공부하려고. 시민대학에 등록했어. 문학 강좌가 있더라. 이제라도 시를 제대로 배워보려고. 은지가 - 정말요? 엄마, 멋있어요! 어머니가 수줍게 웃었다. - 육십에 뭘 배우겠어. 그래도 하고 싶어.
다음 주, 어머니는 첫 등교를 했다. 가방을 메고 나가는 모습이 대학생 같았다. 아버지가 - 당신, 학생 같아. 예뻐, 하고 말하자 어머니가 얼굴을 붉혔다. 민수가 - 엄마 파이팅! 하고 응원했다. 첫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들떠 있었다. - 오늘 하이쿠를 배웠어. 짧은 일본 시인데 참 좋더라. 그리고는 수첩을 꺼내 보였다. ‘봄비 내리네 / 주름진 손 씻으며 / 새싹을 본다’ 어머니의 첫 하이쿠였다. 은지가 - 엄마, 좋아요. 느낌이 살아있어요. 어머니가 기뻐했다.
어머니는 매일 시를 썼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편, 저녁 먹고 한 편. 소재는 일상이었다. 된장찌개 끓이는 일, 빨래 너는 일, 손녀와 노는 일. 모든 것이 시가 되었다. 은지는 어머니의 시를 읽으며 새로운 어머니를 발견했다. 섬세하고,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어머니를.
어느 날 어머니가 은지에게 부탁했다. - 은지야, 엄마 시 좀 봐줄래? 선생님이 문예지에 투고해보라는데 자신이 없어서. 은지가 읽어보니 좋았다. 진짜 좋았다. 기교는 없지만 진심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 엄마, 이거 충분해요. 투고해보세요.
한 달 후, 어머니에게 당선 통지가 왔다. 작은 문예지였지만 어머니의 시 ‘빨래터의 여인들’이 실렸다.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잡지를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 내 이름이 여기 있어. 시인 이정숙. 정말 내가 맞아?
가족들이 축하 파티를 열었다. 아버지가 - 우리 집에 작가가 두 명이네,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민수가 - 엄마도 인세 받아요? 하고 물어 모두가 웃었다. 손녀가 할머니 품에서 까르르 웃었다. 행복한 웃음소리가 집 안 가득 퍼졌다.
오늘 어머니의 비밀을 알았다. 어머니도 문학도였다. 30년을 미루고 묻어둔 꿈이 이제야 피어난다. 육십에 시작하는 문학.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어머니의 시에도 빛이 있다. 파출부로 살았던 30년의 빛. 그것이 이제 언어가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나는 어머니의 딸이다. 문학하는 어머니의 딸. 이제야 알았다. 내 글쓰기의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머니가 심은 씨앗이 내 안에서 자랐구나. 그리고 이제 어머니도 자신의 꽃을 피운다. 우리는 함께 쓴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