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레전드

by 부소유

중학교 2학년이 되어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1년 만에 같은 교실에서 만난 김명상은 더욱 마른 것 같았다. 교복 셔츠가 헐렁해서 옷걸이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니, 오히려 더 번득였다. 마치 타오르는 촛불이 꺼지기 직전 가장 밝게 빛나는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오락실에 갔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 둘이 더 합류했다. 진호와 상민이었다. 진호는 덩치가 크고 순한 녀석이었고, 상민은 안경을 쓴 모범생이었다. 넷이서 오락실에 가면 자연스럽게 팀을 만들었다.


그날도 우리는 오락실 지하로 내려갔다. 김명상이 먼저 황금 도끼 게임기 앞으로 갔다. 협동 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이었다. 김명상은 여전히 흰 수염의 드워프 전사를 선택했다. 도끼를 든 노인 캐릭터. 나는 근육질의 바바리안을 선택했다.


- 너는 그냥 때리기만 해. 내가 전략은 다 짤게.


김명상이 조이스틱을 잡으며 말했다. 게임이 시작되자 우리의 캐릭터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김명상의 드워프가 앞장서서 걸었고, 내 바바리안이 뒤를 따랐다.


첫 번째 적들이 나타났다. 고블린 무리였다. 김명상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드워프가 도끼를 휘두르며 적들을 쓸어버렸다. 나도 열심히 버튼을 눌렀지만 김명상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 야, 씨발 거기 뒤에! 뒤에 적 있어!


김명상이 소리쳤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 공격했다. 가까스로 적을 물리쳤지만 체력이 많이 줄었다. 김명상이 혀를 찼다.


- 집중해. 너 죽으면 나도 힘들어져.


김명상의 말이 차가웠다. 게임을 할 때의 김명상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친구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었다. 오직 승리만을 추구했다. 그 차가운 집중력이 때로는 무서웠다.


2장에 도달했다. 거대 괴물이 나타났다. 김명상의 드워프가 정확한 타이밍에 구르기를 하며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는 괴물의 등 뒤로 돌아가 도끼를 휘둘렀다. 완벽한 패턴이었다.


- 너는 정면에서 어그로 끌어. 내가 뒤에서 딜 넣을게.


김명상의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내 바바리안이 괴물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김명상의 드워프가 뒤에서 공격했다. 절묘한 연계였다. 괴물이 쓰러졌다.


진호와 상민이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 와, 명상이 진짜 잘한다.

- 프로게이머 해도 되겠어.


칭찬을 들은 김명상이 잠시 웃었다. 하지만 금세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3장, 4장을 거쳐 5장에 도달했다.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적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내 바바리안이 먼저 죽었다. 체력이 바닥나서 쓰러졌다. 김명상의 드워프만 남았다. 하지만 김명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혼자서 적들과 싸웠다. 도끼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 씨발, 씨발, 씨발!


김명상이 연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안경이 코 끝으로 흘러내렸지만 올릴 여유도 없었다. 손가락이 경련하듯 움직였다.


기적적으로 5장을 클리어했다. 하지만 6장에서 결국 게임 오버가 되었다. 김명상이 의자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 너 때문에 졌잖아.


김명상이 나를 보며 말했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김명상이 먼저 일어났다.


- 닌자 베이스볼이나 하자.


이번에는 4인용 게임이었다. 우리 넷이 모두 참여할 수 있었다. 김명상은 당연히 초록색 닌자를 선택했다. 가장 작고 빠른 캐릭터. 나는 파란색, 진호는 빨간색, 상민은 노란색을 선택했다.


게임이 시작되자 네 명의 닌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김명상의 초록 닌자가 선두에서 적들을 쓸어버렸다. 나머지 셋은 그저 김명상을 따라다니며 보조하는 수준이었다.


- 야, 진호! 거기 아이템 먹어!

- 상민이는 뒤 좀 봐!

- 아, 답답해 죽겠네!


김명상이 계속 지시를 내렸다. 마치 군대의 지휘관 같았다. 우리는 김명상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김명상은 게임의 모든 패턴을 꿰고 있었다.


3장 보스전. 김명상의 초록 닌자가 로봇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했다. 나머지 셋은 정면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 지금! 필살기 써!


김명상의 신호에 맞춰 우리 모두 필살기를 발동했다. 화면이 번쩍이며 로봇이 폭발했다.


- 예스!


진호가 환호했다. 상민도 웃었다. 하지만 김명상은 여전히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4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김명상의 몸이 흔들렸다. 순간적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김명상이 왼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른손은 계속 조이스틱을 움직이고 있었다.


- 명상아, 괜찮아?


내가 물었지만 김명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화면 속 적들이 미친 듯이 몰려오고 있었다. 김명상의 초록 닌자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약간씩 타이밍이 어긋났다.


김명상의 닌자가 적의 공격을 맞았다. 체력이 줄었다. 또 맞았다. 위험했다.


- 야, 내가 커버할게!


내가 파란 닌자를 움직여 김명상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김명상이 손을 들어 막았다.


- 건드리지 마. 내가 할 수 있어.


김명상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안경에 김이 서렸다. 그래도 김명상은 멈추지 않았다. 초록 닌자가 다시 적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4면 중간에서 김명상의 닌자가 쓰러졌다. 게임 오버. 김명상이 조이스틱에서 손을 뗐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 화장실 좀.


김명상이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걸음이 비틀거렸다. 나는 뒤따라갔다. 김명상이 세면대에 기대어 물을 얼굴에 끼얹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김명상의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 약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물었다. 김명상이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하얀 알약 두 개를 꺼내 물 없이 삼켰다.


- 이제 게임도 제대로 못하네. 씨발.


김명상이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거울 속 김명상은 유령 같았다. 투명한 피부가 형광등 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보였다.


오락실로 돌아왔을 때, 진호와 상민이 다른 게임을 하고 있었다. 김명상은 의자에 앉아 그들을 지켜봤다. 평소 같으면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했을 텐데, 그날은 조용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오락실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김명상이 말했다.


- 있잖아, 나 요즘 꿈을 꿔. 게임 속에 들어가는 꿈. 내가 초록 닌자가 되는 거야. 진짜 닌자가 되어서 뛰어다니고, 싸우고, 적을 물리치는 거지. 근데 그 꿈에서는 아프지 않아. 숨도 안 차고, 힘도 안 빠지고. 그냥 계속 싸울 수 있어.


김명상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김명상의 투명한 얼굴을 물들였다.


- 그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현실보다 꿈이 더 좋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김명상에게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피처였고, 위안이었고, 자신이 정상적인 몸을 가진 평범한 아이라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김명상은 게임 실력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리보다는 월등히 잘했지만, 예전의 그 압도적인 모습은 사라져갔다. 손가락이 예전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고, 집중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김명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집착했다. 매일 오락실에 갔고, 같은 게임을 반복했다. 황금 도끼의 흰 수염 노인과 닌자 베이스볼의 초록 닌자. 그 두 캐릭터만 고집했다.


- 왜 꼭 그것만 해?


한번은 내가 물었다. 김명상이 웃었다.


- 얘네가 나랑 닮았잖아. 작고,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제일 강한 놈들이야.


그렇게 말하는 김명상의 눈에는 이상한 빛이 있었다. 광기에 가까운 집착. 혹은 절망적인 희망.


오락실의 사람들은 여전히 김명상을 전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과거의 전설. 한때의 영광. 그래도 김명상은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당당하게 게임기 앞에 앉았고, 초록 닌자와 흰 수염 노인을 선택했다.


그것이 김명상의 자존심이었고, 김명상의 정체성이었다. 투명한 몸 안에 갇힌 영혼이 자유를 갈망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김명상을 계속 지켜봤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전설을, 그래도 끝까지 불타려는 작은 불꽃을.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