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학기가 시작되었다. 장마철이라 매일 비가 내렸다. 동아리방은 습기로 가득했고, 기타 줄이 자꾸 늘어났다. 매번 조율을 다시 해야 했다. 김명상과 미선이, 그리고 나. 우리 셋은 여전히 함께 연습했지만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미선은 이제 김명상을 ‘명상아’ 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같은 학년이니까 당연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특별한 감정이 묻어났다. 김명상이 노래를 부를 때면 베이스 연주를 멈추고 바라보곤 했다. 그 눈빛에는 감탄과 애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런 둘 사이에서 점점 투명해져 갔다. 기타 실력은 늘었지만 존재감은 줄어들었다. 미선은 내게도 여전히 친절했지만, 그것은 김명상의 친구에 대한 예의였을 뿐이었다.
7월의 어느 날, 동아리 MT가 있었다. 을왕리 펜션을 빌렸다. 바비큐를 하고 술을 마시는 평범한 대학생들의 MT였다. 김명상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꼭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미선이 간다는 것이 이유였을 것이다.
펜션은 바닷가에 있었다. 밤이 되자 별이 쏟아질 듯 보였다.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기타를 돌려가며 노래를 불렀다. 김명상이 미선을 위해 ‘사랑했나봐’를 불렀다. 불빛에 비친 김명상의 얼굴이 평소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아니, 억지로 생기 있는 척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미선이 김명상 옆에 앉아 있었다. 어깨가 닿을 듯 가까웠다. 가끔 추워하는 미선에게 김명상이 자기 겉옷을 벗어주었다. 미선이 고마워하며 받아 입었다. 김명상의 옷이 미선에게는 너무 컸지만, 그것이 오히려 친밀해 보였다.
나는 건너편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쓴맛이 입안에 퍼졌다. 준호 선배가 옆에 와서 앉았다.
- 너도 미선이 좋아하는구나.
선배의 말에 놀랐다. 그렇게 티가 났나 싶었다.
- 근데 미선이는 명상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선배가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사람 입에서 들으니 더 아팠다.
새벽 2시쯤,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진실게임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병을 돌려서 걸린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게임이었다. 병이 돌고 돌아 미선에게 멈췄다.
- 미선아, 우리 동아리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은?
누군가의 질문에 미선이 얼굴을 붉혔다.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 비밀이에요.
- 에이, 규칙이야. 말해야지.
선배들이 재촉했다. 미선이 김명상을 슬쩍 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 찰나의 눈맞춤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 그냥... 음... 패스할게요.
미선이 벌칙으로 술을 마셨다. 하지만 모두가 답을 알고 있었다. 김명상의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기쁜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숙취로 모두가 늦잠을 잤다. 나는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갔다. 펜션 뒤편 작은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앞에 김명상과 미선이 보였다. 둘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나무 뒤에 숨어 지켜봤다. 김명상이 뭔가 말하고 있었고, 미선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 김명상이 갑자기 멈춰 섰다. 미선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미선이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순간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조용히 돌아섰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서울로 돌아온 뒤, 김명상과 미선은 공식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같은 학년 커플이라고 다들 부러워했다. 나도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8월의 어느 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동아리방에 갔더니 미선이 준호 선배와 함께 있었다. 둘이 가까이 앉아 악보를 보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미선이 선배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며칠 뒤, 미선이 김명상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준호 선배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명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동아리방에 나왔고, 평소처럼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에 생기가 없었다.
진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미선이 김명상의 병을 더 잘 알게되면서 두려워했다는 것.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서웠다는 것. 그래서 안전한 선택을 했다는 것. 준호 선배는 건강했고, 평범했고, 미래가 보였다.
어느 저녁, 김명상과 둘이 술을 마셨다. 김명상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이었지만 그날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소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 씨발... 나도 알아. 내가 부담스럽다는 거.
김명상이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 근데 그래도... 좀 더 옆에 있어줬으면 했는데...
김명상이 울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어깨가 들썩이며 울었다.
- 너도 미선이 좋아했지?
김명상이 갑자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미안해. 내가 먼저...
- 아니야. 미선이가 널 선택한 거야.
- 그리고 버렸지.
김명상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우리는 그날 밤새 술을 마셨다. 같은 여자에게 버림받은 두 남자의 우울한 술자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밤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같은 상처를 공유한다는 것이 우정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