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낭만, 일의 환상

낭만이 있어?? 환상이 있어??

by 부소유
우리는 과연 일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홀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크루소는 자신의 이익과 실용성에 근거한 선택을 한다. 오늘날 우리는 크루소의 유산을 공유한다. 크루소에게 일은 삶의 수단을 공급하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제공해 주는 약속인 것이다. (p90)


자신의 소명을 찾아 떠나는 소설 속 로빈슨 크루소,
그는 진정한 Morden economic man,
근대적 경제인의 원형인 것이다.


애덤 스미스보다도 먼저, 프랭클린은 부가 사회에 이득이 되고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p92)


18세기에 들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의 목적과 비슷한 이유가 나오게 되었다.


자수성가한 미국인의 대명사인 앨저가 쓴 동화에서 가장 일관되게 나타나는 메시지는 아마도 아메리칸드림으로서의 노동윤리의 표현일 듯하다. 즉, 미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p94)


19세기 미국사회에서 아이들에게 부지런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 후 미국에서는 <통나무집에서 백악관으로> 같은 책이 쓰였다. 이 책에 따르면, 워싱턴 대통령은 농장에서 백악관으로 왔으며, 가필드는 통나무집에서, 링컨은 개척자의 집에서, 그랜트는 무두질 공장에서 각각 백악관으로 입성했다. (p97)


전기 형식의 아메리칸드림 성공담들이 출간되었다.
American의 철자 속에 포함된 나는 할 수 있다.
[I CAN]을 장려했다.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 열쇠가 된 것이다. (p99)


아직까지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심리학이 이때부터 성장한 것이로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영역에서 훌륭한 생산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p101)


마르크스는 산업화를 겪으며 선택당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위와 같이 경고했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노동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르네상스인’이자 ‘일벌레’이기도 했던 윌리엄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p104)


모리스는 일의 희망에 대해 말했다.
작업장의 정원, GWP(Great Work Place)를 말한 것이다.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p106)


전문가와 장인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무보수로 자원봉사를 하는 의사, 변호사, 선생님, 강사들을 생각해 보고,
장인정신으로 일하는 장인들을 생각해 봐야겠다


루터와 프랭클린이 일에 대해 생각했을 때, 그들이 생각한 것은 소규모 농장주, 가게 주인, 혹은 장인이었다. 오늘날의 우리 역시 다른 사람 아래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포도밭을 소유하거나 가게를 열거나 독립적인 컨설턴트로 일하는 것, 혹은 개인 개업을 꿈꾼다. (p110)


극히 공감하는 문장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고용되어 일하고 있다.
사실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모험을 떠나고 싶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