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역사

일이 역사가 있어??

by 부소유
아담의 ‘저주’에서 신이 내린 ‘소명’으로, 그리고 ‘삶의 목적’이 되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p65)


일이 ‘저주’라는 생각, 어쩌면 우리 경쟁 사회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저주를 받고 있는구나 라고 생각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p67)


물질세계에서의 일은 영속성이 없다는 것, 그리고 덧없고 열등하다는 것.
이렇듯 고대의 동서양에서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힘을 덜 쓰는 직업인 ‘화가’는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p69)


이것이 깨끗한 일과 더러운 일의 기원인 것일까.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라고 했다. (p70)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부터 일의 개념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무기력’을 “정오의 악마”라고 불렀다. 그것은 오후에 수도사들을 공격해서, 그날 하루가 마치 50시간 동안이나 지속되는 것처럼 만들었다. (p72)


기독교에서 일곱 가지 큰 죄, 교만, 탐욕, 색욕, 분노, 질투, 탐식, 태만 중에 태만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무관심, 삶의 흥미 상실, 병적 무력증, 행동하기 싫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까지 확대시켰다. 즉,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성실히 일하라고 장려한 동시에,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에 대해서는 경계한 것이다. (p74)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에서
일하라, 그리고 기도해라!로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는 천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르네상스인은 스스로의 정신과 영혼, 육체와 두 손을 훈련시켜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p80)


아름다운 일을 하는 르네상스인이 생겼다.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다.
최초의 르네상스인 알베르티의 말이 인상적이다.
[삶이란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것.]


16~18세기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할 정도로 해야 할 노동이 많아졌다. 이렇듯 일의 가치가 상승하자 천국의 문을 통과하는 첫 번째 사람이었던 거지들이 비난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 일을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부랑자와 거지가 되어야 했다. (p84)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가 등장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선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열등하다는 것.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p86)


근대에 들어서 사람들은 일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