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너무 낯선 관계 - 시아버지.
한달만에 올려보는 브런치 스토리.
그 간 별일 없이 또는 나의 루틴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급작스럽게 변화한 날씨보다 느리게 천천히 또는 조금은 지루할 수 있는 일상의 나날들이였다.
남편의 아버지, 그러니까 시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시다.
남편이 중학교 때 이혼하셔서 간간히 연락만 하고 지내고, 명절 때 가끔 찾아뵈었던 게 다였던 인연이었다.
돈으로 사고 치시고, 나와 친정 식구들에게 돈으로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믿고싶다.) 도 하신 분이여서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그닥 반가운 시아버지는 아니였다.
나에겐 뉴스에서만 들어보던 낯설은 단어인 "개인파산"도 신청하셔서 시아버지에게는 신용카드도 없고, 기초생활 수급자이기도 했다.
돈이 없어 학비가 부담스러울까봐 시립대와 국립대밖에 선택지가 없었던, 시립대 장학생이였던 남편과 시립대에 다니다 반수해서 서울대에 들어간 시동생에게 "너희 앞으로 댄 대학 등록금이 제일 아까웠다"는 말씀을 하셔서 나의 내적 인연을 과감하게 끊어버릴 수 있었던 분.
그런 시아버지가 3년전 대장암 판정을 받으시고 수술과 항암을 반복하셨다.
3년간 훌쩍 늙으신 모습에 연민도 물론 들었지만,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해놔야 겠다는 다짐과 함께 연금 저축을 가입했다.
수술비가 없어 시동생 내외와 우리 가족이 큰 돈을 드리기도 했다.
많이 괴로웠다. 마음으로 우러나오지 않는 진심에 내가 이렇게도 못된 사람인가 자책도 했다.
지난 금요일 남편이 시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갑자기 가야한다고 연락이 왔다.
복지사에게서 시아버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119를 불러 문을 따려고 한다고 가봐야한다고 했다.
119가 문을 따보니 사람이 살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집에 시아버지는 의식 없이 쓰러져 계셨다고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다리에는 피투성이를 하고.
끔찍한 상황에 남편과 시동생은 바로 병원을 향했고, 돌아온 남편은 축 늘어진 어깨로 호스피스 진단을 내린 의사 진단서를 건넸다.
그의 마지막을 내가 어떤 얼굴과 어떤 감정으로 맞이할지 잘 모르겠다.
너무 복합적인 애증의 관계여서. 나에게도 너무 낯선 감정이기에.
현재 있는 병원에서는 더이상 치료와 입원이 불가하여 조만간 서울 근교의 요양병원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얼마나 곁에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이 감정이 더이상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게 마무리될 수 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