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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캐스트 Dec 04. 2023

구축아파트의 겨울은 어떤가요?

Part13. 단지 내 난방비 1등입니다만

누군가 내게 구축아파트의 겨울은 어떤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시한폭탄을 품고 지내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이틀에 걸쳐 이삿짐을 모두 정리한 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여느 때처럼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딩동) 관리실에서 왔습니다.


이사때문에 연차로 쉬고 온 지라 밀린 일들을 하며 바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누군가 집을 찾아왔다. 아직 낯선 동네, 낯선 집에서 혼자 있는데 벨소리가 울리니 순간 겁부터 났다. 이상하다 택배를 시킨 것도 없고 이 시간에 방문할 사람이 없는데..


문을 여니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분이 계셨다. 나의 경계심 어린 표정을 느끼셨는지 본인이 누구인지와 본론부터 말씀 주셨다.




지난달 난방비가 이상해서
점검하러 왔어요.


응? 우리 이사 온 지 이틀차인 지난달 난방비라니?


집을 인계받은 것은 11월 1일, 인테리어 공사가 시작된 건 11월 중순부터 12월 30일, 우리가 이사 온 건 12월 마지막 날이라 실질적으로 우리가 쓴 난방은 12월 31일 단 하루였다.


몇 월 난방비가 이상한 거예요? 저희 이틀 전에 입주했는데..


12월 난방 사용량이 이상하단다. 싱크대 아래를 봐도 되냐며 여쭈신 뒤 후레쉬로 이리저리 비춰보셨다.


(직원1) 아이고야 이게 이렇게 돌아가있네.
(직원2) 큰일 났네 큰일 났어. 누가 이렇게 돌렸대


도통 무슨 일인지 몰라 궁금함과 불안함이 엄습했다. 두 분이서 계속 진지하게 이러쿵저러쿵 보며 이야길 나누고 계셔서 옆에서 우선 기다려봤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아자씨... 제발 말 좀 해주세요...!)


12월 31일에 이사 오셨다고요? 그럼 12월엔 빈집이었나요?
-네, 저희 이사는 그때 왔고 인테리어 공사는 12월 30일까지 했어요.



구축아파트인 우리 집의 난방은 지역난방이다. 본가에 살 때 중앙난방과 개별난방은 들어봤는데 지역난방은 생소했다.


지역난방 : 지역별로 설치된 대형 발전소에서 난방수를 끓여 각 세대에 공급하는 방식.

-장점 : 보일러를 따로 구비하지 않아도 되어 관리편의 및 공간활용도 높음, 세대별로 온도조절 가능
-단점 : 일정 온도 이상으로 실내 온도 높이기 어려움, 아파트 컨디션에 따라 세대별 온도 다를 수 있음(특히 구축아파트..)


지역난방비 측정 방법은 열량계와 유랑계로 나뉘어 있다. 우리 아파트의 경우 집에 들어오는 온수의 사용량으로 비용을 측정하는 유량계 방식이었다.





단지 내에서 난방비 1등 하셨어요.



난방비 1등이라니.. 보통 1등이라고 하면 희열부터 느끼는데, 이번 1등 소식은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밸브 보이시죠? 이 온수량 조절기가 지금 최대로 돌아가고 있어요. 보통 이 정도까지만 돌려놓는데 최대로 돌아가있습니다.
- 저희는 따로 건든 적이 없는데...


집에 들어오는 난방온수량을 조절하는 밸브가 최대치로 열려있다고 한다. 전주인이 퇴거할 때 관리실에서 기존 관리비 책정을 위해 집을 체크하신 후 분명 밸브가 잠긴 것을 확인까지 하셨다고 했다. 근데 왜...?


당황스러움으로 잠시 뇌 가동이 멈춰있을 때, 불현듯 몇 주 전 인테리어 사장님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OO씨, 오늘 장판이랑 도배공사하는데 겨울이라 잘 안 말라서 난방 좀 틀어놓을게요.


무지한 나는 '그럴 수 있겠군, 당연히 잘 말려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게 그러시라고 했었다. 그땐 우리 집이 지역난방인 것도, 밸브로 온수량을 조절한다는 것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난방은 계속해서 밸브가 최대치로 열려있었고, 그걸 모른 우리는 입주한 날도 날이 추워 그저 난방기를 틀고 원하는 온도로만 맞춰놨었다. 심지어 너무 높은 온도로 틀면 난방비가 많이 나올까 봐 소심하게 26도 정도로만 맞췄던 우리다.



이거 사장님께 얘기해 보셔야겠는데요. 이 정도 온수량이면.. 아이고야 어떡한다냐..


나와 같은 심정처럼 관리소 직원분들은 할 말을 잃으신 듯했다. 아니면 내가 너무 충격받을까 봐 말씀을 아끼셨을 수도..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나오는데요?"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직원분들이 알려주신 액수는 대략 70만 원대. 응? 난방비만 70만 원이 나올거라구요??


나만큼 놀라신 듯한 직원분들은 사색이 된 내 표정을 보셔서인지 진심으로 같이 걱정해 주시며 해결방법을 고민해 주셨다. 우선 이건 입주민분이 사용하신 게 아니라 공사 쪽에서 사용한 거니 사장님께 비용을 청구해 보라며. 전액은 아니더라도 통념상 일부 챙겨주시는 사장님도 있으니 얘기라도 해보라고 하셨다. 밸브 조절방법과 어느 정도 돌려야 난방비 폭탄을 피할 수 있는지 세심하게 알려주시며 집을 떠나셨다.


직원분들 말씀처럼 인테리어 사장님께 청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내가 미처 체크하지 못한 채 난방 사용을 허용했기 때문에 이를 왈가왈부 따진다는 게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걸 어떡하지, 남편이 알면 분명 인테리어 쪽에 따지려들텐데, 우리 비용도 많이 깎아주시고 잘 진행해주셨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되지 않으려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 그날 오후 업무에 집중하지 못한 채 퇴근을 한 남편을 억지로 웃으며 맞이했다.



경축! 단지 내 난방비 1등!!!


실제 청구된 난방비는 약 75만 원, 총 관리비는 약 90만 원...! 남편에게 바로 말하진 못했다. 마침 그 달 인센티브로 꽤 많은 돈이 들어와 그 돈으로 신혼집 첫 관리비를 냈다. 어쨌든 무지한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니까.


오히려 회사사람들에겐 바로 말하게 됐다. 친한 동료가 근래 급격히 어두워진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일 있냐며 걱정을 했다. 어디라도 털어놓고 싶었던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시전했다...! 진심을 얘기하면 너무 안쓰럽게만 볼 것 같아 괜히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이런 1등은 안 해보셨죠? 저 난방비 1등 나온 사람이에요!!"




그날 이후 내 재택근무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니 사실은 모든 일상생활이 달라졌다.


(좌) 미라 아닙니다.. (우) 놀러온 친정집 강아지


엄동설한의 날씨에도 절대 난방을 틀지 않았다. 관리소에서 밸브를 조절해주셨지만 그럼에도 한 번 난방비 폭탄을 맞아보니 난방기를 트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방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가만히 있어도 코끝이 시려웠으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내 손은 언 것만 같았다.


대신 매일 신을 수면양말 여러 장과 겨울용 실내화를 사고, 소파에서 덮을 두꺼운 겨울 담요와 성능 좋은 전기장판을 구매했다. 수면양말을 신고 겉옷을 입어도 추운 날엔 노트북을 들고 전기장판을 켠 침대로 향했다.

남편한테도 관리비를 낸 날 이실직고를 했다. 다행히도(?) 놀란 나를 진정시켜주며 이놈의 구축아파트를 함께 욕해준 남편, 고마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년이 지난 이번 겨울도 우리는 여전히 난방을 틀지 않는다. 그새 몸이 익숙해진 건지 이제 12월 밖에 안돼서 그런 건지 썩 버틸만하달까.


가끔 이 겨울날씨에도 집에선 반팔을 입고 지낸다는 지인들의 얘길 들으면 현타가 오긴 한다. ㅂㄷㅂㄷ 우리가 선택한 30년 된 구축인데 어쩌겠어.

오늘도 나는 난방 검침량 적는 곳에 펜을 들고 메모를 했다. '난방 미사용!!!'




다음편) 집에 필요한 게 이렇게나 많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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