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개 Nov 08. 2021

혼자이고 싶은 이유

날 것 그 자체인 내 감정들을 숨기기에 급급한

MBTI를 맹신하지는 않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내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유사한 MBTI를 보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INFP인데 이전에는 E였다가 I로 된 것은 인간 관계의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내 방어 기제가 발동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마찰을 선호하지 않는다. 부딪히면서 발전해나가는 관계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 사실 이런 믿음은 나의 희망에 가깝다. 나랑 부딪힌 사람들은 끝없이 부딪혔다 ― 부딪히는 순간과 감정의 날이 선 내 모습이 싫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제법 이성적인 사람인 줄 알지만 나는 엄청나게 감정적이다. 그리나 그 감정을 기가 막히게 잘 숨길 뿐이다.

<이터널 선샤인(2014)> 처럼 기억이 삭제되길 바랄 때도 많았다. 그만큼 아직도 사람은 나에게 무섭다 ⓒ europeanfilmaward.eu

 사실 숨긴다는 표현보다는 티가 나는데 나 혼자 아닌 척 하는 경우가 많다. 열등감이 심해 화도 많고 상당히 예민해 어느 구석 하나하나 짜증날 때도 많다. 소위 "꼭지가 돈 적"은 그리 많지 않지만 자잘자잘한 짜증들을 모으면 수도꼭지처럼 콸콸콸 쏟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내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내가 날이 서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자제하고 숨긴다.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가끔은 부작용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하지만 숨기지 못하는 순간들도 여럿 존재한다. 사람들과 같이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순간들도 있고 설득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 감정은 상당히 예민해진다. 물론 이 순간에도 이해타산을 따진다거나, 그에게 감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꾹 참으면서 나 혼자 울그락불그락 한다.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곧바로 연락이 온다. "형, 오늘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숨기는 이유는 몰라도 화가 난 이유는 얼추 맞춘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하나 공감하며 회포를 풀기엔 내 감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실망스러운 감정의 연속이다. 방법은 그 하루를 그저 잘 넘기고 다음 날 아침, 금붕어처럼 까먹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감정으로 새겨진 기억은 제법 오래가곤 한다.

<미생(2012)>에서 장그래는 본인이 어른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나도 과연 어른일까.

 남들 앞에서는 성숙한 척, 어른인 척 다 하지만 사실 엄청나게 미성숙하다. 감정을 숨기기 어려울 때도 있고 격렬하게 화를 내고 싶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성숙한 척 가면을 쓴 이상 이런 모습은 어떻게든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사람이랑 섞이지 않으면 화가 나거나 감정적으로 대립할 이유가 없으니. 농담처럼 "내 주변은 '그 나물의 그 밥'이야"라고 말하는데 이 역시 이런 이유다. 문제는 '그 나물'들이 실망스러울 때 혹은 나한테 실망할 때, 나는 첨예한 감정을 드러낼 거 같아서 무섭다. 화가 나면 상당히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만 가공된 감정은 아녀서 날 것 그 자체가 나와버리는데 어떤 식일지 이제는 감도 오지 않는다. "꼭지 도는 순간"이 너무나도 옛날이라 더 모르겠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 눈물을 뚝뚝 흘릴 때도 많았다. 억울함이 클 때 더욱 더 그러는 것 같다. 그 모습은 내 기준, 더 추하다. 추한 모습은 일체 드러내고 싶지 않다. 실상이 까발려지는 순간, 나는 엄청난 감정의 장애가 있고 혐오스러운 인간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것만 같다. 실제론 덜할 수도 있지만 기대보다 더할 수도 있지 않는가. 애초에 그 가능성을 거세하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혼자이고 싶다.


 군대서 늘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사회 나가면 뭐 하고 싶어"다. 옳다구나 "혼자 있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언제쯤 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결혼이란 걸 할 수 있을까. 혼자가 이렇게나 좋은데, 정확히는 좋다기보단 편하고 부담이 덜한데, 누구에게 정말 내 진실된 추함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내 추함을 이해해달라 말하고 싶지 않다. 나의 그런 모습을 점점 줄이고 싶다. 그 전까지는, 준비되지 않은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 만약 그런 나를 보게 된다면, 당신은 분명 실망할 터이니.

매거진의 이전글 결과물에 "개인 사정"은 없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