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개 Sep 17. 2021

결과물에 "개인 사정"은 없지만

다시는 핑계가 없기를 바라며

블로거 생활을 자처하면서 가끔 "데드라인"에 쫓길 때가 있다. 이를테면 경기가 15일에 있다면 14일에는 프리뷰를 작성해야 하는 그런 부류들. 대부분은 "노 페이", 열정적으로 하는 일들 뿐이지만 가끔 돈이 걸린 문제에선 예민하게 해내곤 한다. 시간에 쫓길수록 효율적인 편이긴 하지만 완벽주의자 성향이 이를 용서치 못하면서, 해당 시간 내에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갖춰야 하는 게 늘상의 목표였다.


 이런 면에서 최근, 내 신념과 철학을 무너뜨린 작업물이 있었다. 아싸지만 깝치고 다니는 걸 좋아하여 이것저것 잘하는 척을 많이 했는데 - 그래서 유년 시절, 집에서 "난체"라고 불리곤 했다. "잘난체". - 이런 나에게 모교 공주대학교는 퀘스트를 던져주었다. 모교의 혜택만 쫌생이처럼 받아먹었던 터라 쉽게 거절하지 못했고 또 마음 한 켠의 모험 정신이 "트라이"를 원했다. 나에게 주어진 퀘스트는 바로 학과 홍보 영상 제작. 퀄리티나 요구 사항은 없었으나 15일 안에 만들어야 했고 5분 내외의 영상을 원했으며 또 유튜브에 올라간다는 사실 만으로도 손발이 벌벌 떨렸다.


 만 24세 서보원이 당당하게 돈 받고 할 수 있는 일은 대개 몇 가지 안 된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축구 글 외의 다른 글은 "프로"라고 불리기엔 한없이 모자라다. 사실 축구 글도 나보다 훨씬 잘 쓰는 사람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프로라고 말하긴 부끄럽다. 노가다, 단순 문서 작업 등은 그나마 쓸만하다. 적어도 1인분은 해내는 것들이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면에서 영상 제작은 1인분은커녕 0.01인분, 어쩌면 없어야 도움이 되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인스타 피드에 글을 잘 올리지 않는데 포스팅할 만큼, 나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순간이긴 했다.

 그래도 청춘은 도전이고 패기라고, 나름 파트를 분담했고 나름 콘티를 짰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데마다 손을 벌려 나의 간절함과 불쌍함을 호소했다. 몇몇이 먹혔는지 - 아니면 나처럼 오늘만 사는 놈들인지 - 도움과 자문을 흔쾌히 해줬고 영상 짜깁기 수준의 기획에서 촬영까지 일을 벌였다. 주로 출연하는 배우도 필요했는데 그날 처음 본 후배에게 부탁했고, 영상 말미에는 편집하다가 부족하다 싶은 부분들을 즉흥적으로 찍기도 했다. 이런 내 열정에 감동했는지 본래는 지급되지 않은 보조비용이 지급되었고 나는 오롯이 그걸 카메라를 사는데 보탰다.


 하지만 프리미어를 컷 편집에 사용하는 수준이었던 나에게 영상 편집, 전환 등은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 잠을 아끼고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교보재란 교보재는 다 뒤져보며 해봤지만 능력 밖의 일들처럼 여겨졌다. 결국 데드라인은 코앞까지 다가왔고 컨펌 단계에서 하루를 더 빌려봤지만 내가 원하는 기준치에 미달하는 영상이 탄생했다. 기획 단계에선 '영상 쪽으로 일하고 싶다. 그렇다면 화려하게 데뷔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이 어린 청년은 뭉크처럼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진 행운 같은 기회였으니, 나는 사실상 할 말이 없다. 준비를 잘했어야지- 평소에 좀 열심히 해놓지- 라는 생각만 곱씹으며 영상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은 가장 솔직했다. 그래서 좋았다.

 피드백은 나름 긍정적이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충혈된 눈과 꾀죄죄한 모습들이 내가 헛되이 하지 않았노라-라고 티 냈고 이를 바라본 주변인들은 "잘했다"라고 말해야만 내 고생을 치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고생은 했는데 솔직히 별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었어도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내 스스로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였으니.


 그렇다고 유튜브에 댓글로 구구절절 내 사정을 말할 순 없었다. "저는 사실 프리미어 기초 수준인데 보름 만에 만드느라 많이 흉합니다. 부끄러운 퀄리티입니다. 그래도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건 더 부끄러웠다. 남들은 내 사정을 알아줄까? 당연히 아니다. "공주대학교 경영학과"라고 검색하면 뜨는 이 영상을 보고 공주대학교 혹은 경영학과에 들어오고 싶어 질까? 그것도 당연지사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기준치에는 확연히 미달이다. 나는 구리고, 부족하고, 데뷔전을 망쳤다. 최악이다.


 언젠간 이렇게 썰처럼 변명할 수 있는 시간이 올까? 그땐 내가 성공 이후일까, 실패 이후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금 결과물에 대한 책임감을 뼈아프게 느낀다. 기회는 원할 때 오지 않는다. 좋아하던 TV 시리즈였던 <청춘 FC>에서 안정환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공격수에게 입맛대로 오는 패스는 없다." 예상치 못한 순간 기회는 올 테고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득점하지 못한다. 그럴 때 이 공격수에게 사정을 따질까? "쟤는 사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어", "오른발을 최근에 다쳤대" 등 이런 말들은 결국 변명일 뿐이다.


 이렇게 징하게 현타가 올 때면 보는 광고가 두 개 있다. 둘 다 나이키 광고인데 하나는 마이클 조던의 <단 하루도 빠짐없이>, 또 다른 하나는 이영표의 "너를 외쳐봐"다. 조던은 실패가 없었다면 성공이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핑계 대지 말아라"라고 광고에서 외친다. 이영표는 주변에서의 편견과 시선, 그리고 문제적 의식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도 끝까지 하겠다는 거야?"라고 외치는 순간, 나는 가슴이 뛰는 일을 해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영상이든 뭐든, 내 손을 거친 그 모든 것들의 완성도는 주변이 아닌 내가 결정하기를 원한다. "핑계 대지 않고" "끝까지". 쏟아지는 일들 속에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려 이렇게 반성문을 적는다. 나는 해내야 하고, 멋있게 해낼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이는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다. 해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하지 못함에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