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hing Serious》 현대 연애사의 가벼운 회고록
이 글은 국내 유일의 OTT 미디어, <OTT 뉴스>에 2022년 6월 27일 자로 기고된 글의 연장선입니다.
'N포세대'는 이제 '완포세대'에 도달했다. 연애, 결혼, 출산만 포기하던 삼포세대에서 취업, 내 집 마련을 포기하더니 건강, 외모관리와 인간관계, 희망까지도 포기해버렸다. 그래도 사람인 나머지 기본적인 욕구에는 늘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건 마치, 밥 먹기 싫어도 먹어야만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두 남녀의 어쩔 수 없는 로맨스, <연애 빠진 로맨스>다.
감독: 정가영
장르: 로맨스/멜로/코미디
개봉: 21. 11. 24.
시간: 95분
연령제한: 15세 이상 관람가
국내 관객 수: 606,537명 (22. 6. 24. 기준)
이후의 내용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인생 존나 피곤하게 사는 법 알려줄까? 연애질 하면 돼"
섹스는 나랑 하고, 결혼은 딴 년과 하는 전 남친과의 지독한 연애 사정 때문에 연애 은퇴를 선언한 함자영(전종서 분)이지만 몽정을 할 만큼 사랑이 고프다. 일도, 연애도 마음대로 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데이팅 앱에서 꼬이는 남자들은 마음대로 하는 편이다. 다만 자존심 때문에 이를 허락하냐, 마냐를 저울질할 뿐.
잡지사에서 일하는 박우리(손석구 분)는 본의 아니게 섹스 칼럼을 담당하게 된다. 섹스라곤 약혼을 앞둔 직장 상사의 위로 차원에서 행한 게 전부인지라 허하고 실망스러운 느낌밖에 없다. 프로페셔널한 마인드로 섹스를 행하기 위해선 데이팅 앱이 어쩌면 최선. 친구의 조언을 받아 프로필을 등록한다.
그렇게 둘은 설날에 만나게 된다. '직박구리' 우리는 헌혈을 하고 나오는 '막자영' 자영과 마주친다. '명절에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라고 말하며 옆 테이블의 수육을 먹는 자영은 평양냉면집에서 우리와 소주 한 잔 한다. 천방지축 하면서 솔직한 자영의 성격에 우리는 호감을 느끼고 둘은 깔끔하게 사랑을 나눴다.
'섹스 없는 섹스 칼럼'으로 극찬을 받은 우리는 5부작으로 지시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자영을 더 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자영을 술집에 부르고 둘은 시시콜콜하게 얘기한다. 우리와 자영 모두, 사랑에 상처받았지만 사랑하고 싶었기에 주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로를 채워가던 열 번째 만남, 우리는 참지 못하고 자영에게 말한다. "사랑해." 자영은 우리를 떠나고 둘은 서먹해진다.
우리의 칼럼은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5부작은 10부작이 되었다. 우리는 자영을 생각해 더 연장하지 않길 바랐지만 상사의 강요를 이기지 못한다. 자영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지― 하고 만난 그날은 자영의 전 남자 친구의 결혼식날이었다. "깽판 같이 쳐줄게"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자영과 함께 식장을 들어서고 착잡한 자영을 위해 우리는 방명록을 훔치는 비범한 짓을 행한다.
할 말은 하지 못한 채 놀이공원에 가게 된 우리와 자영. 자영은 우연하게 우리의 폰을 보던 중 섹스 칼럼을 보게 되며 크게 실망한다. 이를 알아챈 우리는 자영을 붙잡으며 사과하지만 자영은 분노하며 우리가 한 말을 녹음해 인터넷에 공개한다. 우리는 잡지사에서 잘리게 되고 자영은 원하던 팟캐스트 일이 승승장구하지만 공허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레방앗간이건 떡방앗간이건 그것이 다 뭣이 중요한 것이여? 만날 인연은 결국에선 만나게 되는 것이여"
사랑을 해보지 못해 소설이 써지지 않았던 문예창작과 출신 우리는 자영이 "내가 소설 쓰게 해 줄까"라고 한 말을 잊지 못해 키보드를 두드린다. "만날 인연은 결국 만난다"는 할머니의 말에 혼란하던 자영은 또 다른 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피 뽑고 냉면 먹으러 가는데 '행주 삶은 물'이라고 말하던 그 남자, 우리를 발견한다. 작년의 자영처럼 소주와 냉면을 곁들이는 우리는 자영을 보자마자 뛰어가 그를 잡는다. 바늘이 무서운 그 남자는 자영이 생각나 헌혈까지 했다며 진심을 드러낸다. "자영아, 나 너 보고 싶었어."
지금은 핫하다 못해 뜨거운 손석구, 전종서 조합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재조명받아야만 한다. 재치 넘치는 대사와 능글맞은 그들의 연기는 영화의 때깔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특성상 몇 가지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인데 ① 감정 없는 남녀가 섹스를 하게 되고 ② 그 섹스는 어느덧 사랑이 되어 ③ 오해의 소지가 무던한 상황 속에서도 ④ 끝끝내 사랑이라 말한다. 이 기승전결을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만들어 공감을 사느냐, 상큼 발랄하게 만들어 연애 욕구를 대리 표출하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데 <연애 빠진 로맨스>는 그 둘의 어중간함을 마치 평양냉면처럼 감칠맛 나게 만들었다.
매력적인 대사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오지선다로 표현하는 사랑과 솔직하고 직선적인 주인공들의 감정의 흐름은 관객으로 하여금 홀리게 만들었다. SP는 사실 송편, 그러니 나눠 먹어야 하고 서른의 이유는 서, 얼른 이라니. 발칙하면서도 솔직한데 그리 천박하지 않다. 적당하게 야하면 역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대사로써 증명한다.
배우들의 케미스트리는 단연 이 영화의 핵심이다. 대사가 빛을 발하려면 배우들의 연기 톤과 분위기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 손석구는 일찍이 <멜로가 체질>에서 대담하면서도 찌질하고 귀여운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전종서는 <버닝>에서 사연 많은 캐릭터로 등장해 이유 모를 매력을 물씬 풍겼는데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는 이유가 너무나도 타당한, 매력 덩어리로 등장한다. 러닝 타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둘에 대한 매력이 차고 넘쳐 마지막 씬에는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들 정도다.
독립 영화계에서 팬층이 두터운 감독 중 하나인 정가영 감독은 솔직한 연애담을 풀어쓴 영화로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이 정도면 첫 상업 영화도 성공적이다. 비록 독립 영화에서 보여준 도발적인 연출과 직설적인 대사들은 다소 순화되었지만 1단계 마라탕도 결국엔 마라탕이다. 연애가 싫어져서 섹스파트너를 찾아야만 하는데 결국에는 연애하고 싶어지는 그 아이러니함을 불쾌하지 않게 잘 설명해줬다. 사실 가볍게 사랑하다 보면 진지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거 아닐까. 영어 부제가 그렇듯, 어쩌면 시작은 진지하지 않아도 될 지도.
영화의 가제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딴 <우리, 자영>이었다.
정가영 감독의 전작들을 영화 중간중간에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산 뮤지컬 티켓은 정가영 감독의 <비치온더비치>이었고 자영의 방벽에는 <밤치기>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OST를 부른 선우정아는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자영의 코디는 전종서 배우의 코디에 가까웠다.
손석구와 전종서는 모두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둘은 소주 대신 물을 먹어야만 했다.
개봉 당시 만 38세였던 손석구는 동안 캐릭터를 위해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전종서는 사실 멜로 영화를 찍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대본이 '싸구려 캔커피'와 같은 맛이 느껴져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손석구는 사실 평양냉면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