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그렇게까지 잡을(?)지는 몰랐다.
01. 주간 업무 보고 회의
"마지막으로 제가 이번 주 금요일 휴가예요. 그리고 다음 달 말에 퇴사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약간 화난 표정으로 보고 내용을 대충 들으면서 앉아 있던 D 대표가 놀란 눈을 하고 내 쪽을 쳐다봤다. 요즘 우리 팀(이라고 해봤자 나 혼자)의 업무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던 터라 회의 시작부터 삐딱하고 화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뭐라고...?"
긴장감으로 인해 손과 발이 덜덜 떨렸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참아야 했다.
"아, 제가 다음 달 말에 퇴사한다고요. 그래서 현재 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마무리할 거고, 그 외에 더 정리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미리 이야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D 대표는 내 말에 한 방 먹은 것 같았다. 그러고는 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 나이에 나가서 뭘 하려고?" (나는 40대다.)
"일단 좀 쉬려고요. 지금까지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어서요." (이직처가 정해진 것은 아니니 거짓말은 아니다.)
"쉰다고? 나도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어." (네? 물어 본 적 없는데요..?)
이런 대화라면 끝이 없겠다 싶어서,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한 회사와 집과의 거리를 이야기했다.
내가 입사한 4년 7개월 전에는 우리 집에서 40분 거리였지만, 3년 전에는 1시간 거리로 이동, 그리고 1년 3개월 전에 현재의 자리인 1시간 30분 거리로 회사가 이동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렇게 오래 일한 곳도 없지만, 회사가 이렇게 이동하는 경우도 본 적이 없었다.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서요. 며칠 전에 지하철 타고 오는 데, 진짜 이걸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제야 D 대표는 내가 거짓으로 퇴사를 얘기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인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걸 왜 회의 시간에 휴가 얘기하다가 해요? 아, 그리고 저는 못 들었어요. E 대표님께 말씀하세요."
상황을 그냥 무마하려는 D 대표의 말에 조금 화가 나긴 했지만, 어차피 퇴사하려면 대표 2명 모두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알겠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02. E 대표에게 보고
회의가 끝나고 바로 옆방인 E 대표 방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E 대표는 자리에 있었다.
"대표님,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왜, 무슨 일이야?"
다짜고짜 퇴사를 말하는 것은 안 될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D 대표의 반응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눈에 띈 최근에 새로 표지를 바꾼 교재를 보면서 감탄을 시작했다.
E 대표가 많이 관여한 디자인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면서 이러이러한 점에 엄청 신경 쓰셨죠, 하면서 일단 E 대표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작업을 좀 했다.
"근데 왜? 표지 보러 온 거야?"라는 E 대표의 질문에 더이상은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게... 제가 다음 달 말에 퇴사하려고요."
아니, 근데 왜 눈물이 나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쓰기 전에도 계속 생각해 봤지만, 그 눈물은 일단 '해냈다'라는 시원함이었던 것 같다. 퇴사를 결심한 적이 그동안 여러 번 있었지만, 대형 프로젝트가 맡겨지는 바람에 포기하기도 했고, 퇴사 후가 걱정되어서 결국 말하지 못했었지만, 이번에는 해냈으니까.
"응? 아니, 왜? 사실, 그동안 서향 씨가 고생한 거 아니까, 연말에 월급을 좀 올려 주려고 했거든."
여기 월급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것을 대표도 알고 있었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런데 왜, 월급 인상을 지금 얘기하는 거지? 올려줄거 였으면 작년 연말이나 3년 채웠을 때라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 네. 아시겠지만 출퇴근이 너무 힘들고. 회사 나가서 해 보고 싶은 일들도 좀 있어요."
"무슨 일?" (물어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 너무 예상한 대로인데?)
"뭐, 좀 가르치는 일도 다시 하고 싶고..."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
"아, 그게 여기서 하시는 방향과는 조금 다르게 하고 싶어서요."
E 대표는 계속해서 내가 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는지를 물었고, 나는 최대한 정확한 대답을 피하려고 빙빙 둘려서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 회사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회사에 계속 있다가는 성장은커녕 퇴화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에서 요구하는 업무를 해결하기 위해서 쏟는 에너지를 내 자신의 일을 위해서 쓴다면 뭔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그냥 다른 이야기를 했다. 출퇴근의 어려움이나,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솔직히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했다. 이 회사가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인사라는 것을 말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풀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E 대표는 바로 이렇게 반응했다.
"누구랑 그렇게 안 맞았어? 그렇치 않아도 지난 달에 몇 명을 내보내려고 했는데, 못했어."
퇴사를 말하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는 왜 하는지는 안다. 그동안 이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측근에게만 말하는 것으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올리려고 하는 것이 저들의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속지 않을 거다.
퇴사 보고 후, 거의 2시간 가까이 E대표에게 잡혀서 별에별 이야기를 다 했다. 그 와중에 까먹고 있던 기획을 진행해야 한다고 전달하는 나...(인정한다, 나도 지독한 일 중독이다.)
"서향 씨가 그래도 우리랑 계속 일했으면 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좀 생각해 주면 좋겠어. 월급도 좋고, 일하는 방식도 좋고, 뭐든지 말해줘. 내일 다시 얘기하자."
이렇게 일단 나는 퇴사를 보고했다.
퇴사를 준비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볼 겸, 그리고 이 회사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겸, 글을 써 보려고 한다. 최대한 정제해서 객관적으로 적을 예정이다.
그리고 퇴사를 말하고 난 내 마음 상태는 평온하다. 퇴직 후의 길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후회와 걱정으로 가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평온해서, 일단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나는 퇴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의 퇴사는 현재 진행형이며, 그 과정을 글로 담담하게 써 내려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