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한 적 없잖아요.
퇴사 의사를 밝히기 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렸었다.
예상을 해야 방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그래, 잘 가."
: 굳이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반응이니, 이렇게만 되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은 아쉬울 것 같기는 했다. 내가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니까. 퇴사를 결심한 상황에서 모순적이지만, 그래도 회사에 필요한 인재였으면 했다.
➡️ 이렇게 제발 해 주면 좋겠다.
2. "연봉 올려줄게."
: 연봉 협상이 없는 회사의 경우, 퇴사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연봉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1년 전에 한번 질러 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잘못돼서 결국 퇴사하는 엔딩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도하지 않았다. 지금은 퇴사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연봉 얘기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약 어느 정도 올라가야 이곳을 더 다닐 수 있을지에 관해 잠시 고민했었다. 2배 또는 2.5배까지도 생각했지만, 이 회사가 그렇게 올려줄 리도 없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퇴사를 늦추고 싶지 않았다.
➡️ 연봉 올려준다고 해도, 더 다니고 싶지 않다.
3. "재택근무, 어때?"
: 퇴사의 가장 큰 이유로 '회사와의 거리가 멀다'를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이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택근무, 귀가 솔깃하기는 하지만 대표들은 '재택근무=일을 하지 않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재택근무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봤다. 그들은 퇴사 의사를 밝힌 후, 퇴사일까지 한 달 이상 남았고, 대표들이 그들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재택근무를 명한 경우였다. 결국 여기는 재택근무는 불가능하고, 내가 그 첫 번째 사례가 되고 싶지 않았다.
➡️ 특별대우는 싫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 '더 다니고 싶어질 연봉', '재택근무 여부(하지만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나와야 할 것)', 그리고 '회사 조직 변경'에 대해서 조건을 만들어 오라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딱히 더 생각해 보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미 시뮬레이션을 돌려봤고, 그에 대한 대답도 나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퇴사 의사를 밝히는 면담 이후,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내 자리에 돌아왔다. 퇴사 의사를 밝히려고 생각한 동안은 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것도 조금 힘들 정도로 떨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표들이 말한 조건을 한 번 더 검토했다.
1. 연봉: 2배, 아니 3배를 준다고 해도 더 이상 여기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지금 연봉도 높은 편은 아니긴 하지만, 이 회사 재무 상태를 생각해 봤을 때, 2배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거 같은데... 나가는 마당에 회사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니까 말한 거겠지?
2. 재택근무: 이전에 대표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한 거 같은데, '재택근무는 24시간 동안 일하는 것'이라고. 내가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1일 8시간 일하고, 나는 24시간 일하는 건가? 아니, 그 전에 재택근무를 해도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사무실에 나와야 한다고 하던데, 그러면 의미가 있나? 재택근무를 시켜준다고 해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오래 일했다는 이유로, 인재(?)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고 싶지 않았다.
3. 조직 변경: 아니 15명 남짓한 회사에서 뭘 어떻게 변경하겠다는 건지, 그리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요청해야 하는 것인지를 모르겠는데 이걸 왜 말한 것인지를 몰랐다. 그리고 4년 이상 일하면서 이 회사의 조직변경을 10번은 본 것 같은데, 항상 엉망진창이었었다.
그리고 다음날, 대망의 마지막(?) 퇴사 협상 미팅이 시작되었다.
"다양한 조건을 생각해 보라고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씀해 주신 조건 중 연봉을 제외하고는 재직하는 동안 여러 번 건의를 드린 적이 있었지만, 나름의 이유로 거절하셨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퇴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
나의 말에 대표들은 순간 조용해졌고, 그러면 퇴사의 수순을 밟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인재를 잃었네."
순간 이성을 잃고 날뛸 뻔했다. 최근 에너지 레벨이 거의 최하여서 다행이었다.
'인재를 잃었다고요? 아니, 언제 나를 인재로 생각하기는 했나요? 매번 큰 프로젝트를 마감 시간 빠듯하게 주고, 그것도 엄청 시간 많이 준다는 식으로 인자한 척이나 하고. 그리고 진짜 인재로 생각했다면 연봉을 올려줄 타이밍도 있었을 테고, 그것도 안 되면 처우를 개선한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말들을 겨우 삼키고, 하하하 웃으면서 그러면 다음 달 말일로 퇴사일을 정하는 대표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제는 진짜 퇴사 준비만 남았다.
덧붙이는 이야기: 이사급 중에서 같은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많아서 친해진 S에게는 일단 직접 퇴사 소식을 알렸다. 그랬더니 "우리가 인재를 놓쳤어. 그래서 제가 대표님들한테 연봉 올려주라고 얘기했다고요."라고 말했다. "아, 네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