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경험과 고민의 결과 - 제작, 후가공, 그리고 성책
같은 내용의 책이라도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여러 모양의 책이 나올 수 있다. 이는 비유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그러한데, 일단 ‘판형(책의 크기)’이 그렇고 ‘내지(본문, 표지 안에 주로 하얀 종이에 책의 내용을 인쇄한 부분. 보통 ‘내지’, ‘본문’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디자인적인 구성에는 ‘내지’, 내용적인 면에서는 ‘본문’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의 구성이 그렇고 표면적으로 제일 먼저 드러나는 표지도 그렇다.
거기에 ‘중쇄(重刷, 같은 책을 필요에 따라 수량을 더 늘려 인쇄함. 이를 간기면에 표기하고 찍을 때마다 숫자를 더한다)’를 찍을 때의 미묘한 환경의 변화(종이의 상태, 인쇄할 때의 날씨, 인쇄소마다 쓰는 잉크의 브랜드 등)에 따라서도 각 쇄마다 책이 주는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질 수도 있다. 이는 ‘성책(成冊, 책의 완성)’의 거의 마지막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 ‘후가공’에서도 드러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성책의 과정이 90퍼센트 정도 이루어진 ‘후(後)’에 ‘가공(加工)’하는 것으로, 주로 표지에 쓰이는데, 표지 인쇄를 완료한 후 코팅을 얹는 것도, 그 얻은 코팅 위에 추가로 압력을 넣어 형압(型押, press a figure[design] in intaglio)이나 박(箔, 금이나 그에 준하는 얇은 종이나 비닐 등을 두드리거나 압연하여 원래 종이보다 더 얇게 눌러서 만든 것)을 찍는 것 등을 포함한다. 이 후가공까지 마치고 이미 인쇄되어 페이지 순서까지 맞춘 본문 내지 덩어리에 표지를 붙이기만 하면(제책, 製冊) 책은 완성이 된다. 이처럼 책을 만드는 데는 내용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많은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에 여러 가지 의미에서나 실제적으로나 같은 책은 거의 없다.
여기 하얀색의 책 표지가 하나 있다고 치자. 이 위에 어떤 것을 올릴 것인가. 내용적으로는 책의 제목, 저자, 출판사 이름 등이 들어갈 테고, 그 위에 이미지, 글자 모양, 로고 등이 들어갈 것이다. 이를 ‘컬러 인쇄(4도, 빛의 3요소인 Red, Green, Blue를 변화한 인쇄기에 맞게 변환한 것. Cyan, Magenta, Yellow, K[Black])’를 할 것인가, 흑백 인쇄(1도, K)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색 하나(별색)만 쓸 것인가, 아니면 혼합해서 쓸 것인가(K+별색=2도, 4도+별색=5도)의 문제도 있다. 모든 인쇄가 끝나면 책의 손상을 막기 위해 코팅, 그러니까 열을 가해 막을 하나 씌운다. 이때 코팅이 광택 여부에 따라, 코팅 재료의 재질에 따라 유광 코팅, 무광 코팅으로 나뉜다. 이 코팅도 종이의 종류에 따라 색에 따라 궁합이 있는데, 보통 종이결이 매끈한 경우는 유광이 어울리고 약간의 요철이 있으면 무광이 어울리며 그보다 더 성긴 질감의 종이라면 아예 코팅을 안 하거나 ‘바니시(코팅을 하기 어려울 때 얇은 용액 막을 뿌려 코팅만큼은 아니더라도 책을 보호하려 하는 작업, 실제로는 코팅제 그 자체를 뜻하긴 하지만 실무에서는 앞서 설명한 용법으로 제한돼 사용한다)’라고 불리는 코팅액을 뿌려주는 선에서 끝난다.
아, 복잡하다 복잡해. 여기서 또! 코팅의 종류에 따라 후가공의 종류도 결정 난다. 한 면에서 특정 부분만 반짝이게 하거나 박을 찍는 경우가 그러한데, 유광코팅에 또 반짝이는 무언가를 추가하는 게 좋은지 아니면 반짝이는 걸 전체적으로 눌러주는 다른 효과를 주는 게 좋은지. 아니면! 반대로 무광코팅에 반짝이를 포인트로 추가한다던지… 또 거기에다가…
이런 식으로 하나씩 선택을 하다 보면 어느새 책이 완성이 되어 내 눈앞에 놓여있기도 하다. 대략 생각해 봐도(표지만 정리하자면) 판형 결정, 내용 얹기, 내부 요소 결정, 요소 간 밸런스 맞추기, 인쇄 사양 정하기, 인쇄하기, 제본 전 검수하기, 제본하기, 후가공 확인하기 등 여덟, 아홉 가지는 챙겨야 한다. 처음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 안에서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하면 결과는 처음 의도한 바와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마치 작은 모형배를 물 위에 띄운다고 치자. 잘 가다가 돌부리에 부딪혀 1도 정도 틀어진 채로 떠내려가다 보면 나중에는 1도가 아니라 훨씬 큰 차이 나지 않는가.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작업하면 좋겠지만, 인간이란 무릇 경험을 하고, 경험을 쌓으려면 필연적으로 여러 실수를 겪어야 한다. 하지만 출판은 이 모든 것이 곧 비용이다. 하나씩 실험하듯 해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이 하나, 후가공 하나를 선택함에도 많은 고민이 따른다. 경험을 쌓고 싶자니 비용이 들인 만큼 화제가 되거나 판매가 된다는 확신이 있지 않는 이상 선뜻 발주를 넘기기 어렵다. 설령 발주를 넘긴다고도 그 과정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동의를 얻으려면 설득을 해야 하고 설득을 하려면 나 자신 안에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 확신이 들려면 경험으로 쌓인 근거가 필요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말장난 같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어느 정도의 경험치가 쌓여야 하고 그것이 당장은 빛을 발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빛을 발하는 게 ‘책’을 만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빛을 내는 책들이 분명 있긴 하다. 이것은 앞서 말한 누군가의 켜켜이 쌓인 경험의 결과라고도 아니면 그 과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건 화려하지 않아도, 잘 보이는 매대에 없어도, 판매량도 적어서 서점 노출(온라인 서점에 접속했을 때 잘 보이는 구성에 있는지 여부)이 적더라도 빛나는 책은 아무리 어둡고 구석진 곳이라도 빛나고 있고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느 눈 밝은 ‘독자’ 일 수도, 나처럼 늘 책만 보는 ‘꾼’ 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있다. 가끔은 나를 ‘꾼’만은 아닌 책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게 하는 ‘독자’로 만들어주는 그런 책. 최근에 나는 그런 표지만으로도 빛나는 몇 권의 책을 샀다. 만약 그게 왜 좋냐고 물어본다면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이건 이런 효과를 써서 좋고 이런 접근이 좋고… 등의 말은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만 아껴두기로 했다. 디자인의 비법은 비밀! 그런 것은 아니고 어쩐지 말보다는 보는 것보다는 느껴보고 싶었기에. 내 손에 오기까지 많은 사람의 여러 선택과 고민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들도 충분히 상상되지만 일단은 접어두고, 그냥 빛나는 결과를 느껴 보기로.
덧.
북디자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북디자인의 완성은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가능하다면 완독. 책장을 모두 덮었을 때 밀려오는 어떤 감정선이란 게 있다면 그것이 북디자인을 완성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북디자인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독자와 독서를 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