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런스에 대한 변명과 반박의 한가운데서
디자인을 배울 때 여러 가지를 배우긴 하지만 그중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프레젠테이션(발표)이다. 디자인 자체도 중요하지만 내 디자인을 잘 전달하고 결국 최종 선택까지 이끌어내는 일까지가 디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클라이언트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 자료를 첨부하는데, 이게 요즘 많이 거론되고 있는 ‘레퍼런스’다. ‘레퍼런스’의 원래 사전적 뜻은 이렇다(네이버사전).
reference
1. 명사 (… 에 대해) 말하기, 언급; 언급 대상, 언급한 것
2. 명사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봄, 참고, 참조
3. 동사 격식 참고[참조] 표시를 하다, 참조 문헌(목록)을 달다
이 뜻을 정리해 보면 ‘참고(이해)를 위해 붙이는 말이나 어떤 것’ 정도가 될 수 있겠는데, 더 간단히 말하면 참고 자료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언어라는 게 늘 그렇듯,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한다. 이 ‘참고’라는 실제적으로 어디까지 정의할 수 있을까.
간행물, 그중에서도 논문의 경우 참고 자료, 문헌의 경우 출처를 끝까지 정확히 밝혀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 표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소중한 논문이 한큐에 표절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 마침표 하나 숫자 하나에도 신중을 기해서 작성할 수 있게 교육을 한다. 그런데 이런 꼼꼼한 출처 표기가 예술로 넘어가면 모호한 경우가 생겨버린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예술은 각 장르의 아름다움을 각 형식에 맞게 표현하되, 그것을 단순히 아름다움의 구현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 재해석, 재창조, 재구성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재(再)’ 그러니까 ‘다시(again)’의 의미인데 이를 기존의 자료[레퍼런스]를 가지고 얼마큼 나의 개성으로 내 것으로 만들어 내느냐를 정확히 수치화할 수도 없고 수치화한다 해도 예술 작품이 가진 전체 의미와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 논쟁이 생기기도 한다(레디 메이드[ready made]. 즉, 기성품에 의미를 완전 새롭게 부여해서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하니까). 수치화하기에는 모호하기에 표기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레퍼런스(reference)를 바탕으로 100%는 아니어도 어딘가 새로운 ‘온니 원(only one)’을 만들어낼지, 또 하나의 ‘모방물(copy)’을 만들어낼지, 사기(fraud)에 가까운 ‘농락’을 할지 아니면 정말 ‘사기’를 치는 것인지는 이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의지와 역량, 그리고 이를 받아들여 해석할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판가름 나기도 한다.
때로는 우연과 필연이 겹치고 겹쳐 의도치 않은 표절을 하기도 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표절이지만 그 과정에선 억울한 면이 있는 경우도 분명 있다. 앞서 말했듯 사람이 생각하는 건 거기에서 거기일 수 있고 창작과 모방, 재해석은 한 끗 차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한 표절은 어떻게든 티가 나기 마련이다. 의도한 표절은 그것 자체로 의뭉스럽다. 얼마 전 모 출판사의 표지 표절 사건이 있었다. 복제에 가까운 많은 책들이 나와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출판계인데 이번 반응은 좀 달랐다. 그야말로 SNS가 출렁거릴 정도였고 실제로 기사화도 많이 됐다. 사건의 히스토리는 이랬다. 많지는 않아도 여러 저작을 써오던 작가의 한 작품이 A출판사에서 소위 대박이 났다. 그러자 작가의 기존 작품을 갖고 있던 B 출판사가 제목, 표지의 기본 구도(배치), 표지의 형광색(색감은 전혀 다름) 등을 마치 베스트셀러 작가의 신작 내지는 연작인 양 책을 다시 내놓았다(개정판 아님, 표지와 내지 디자인을 바꾸고, 편집과 교정을 추가로 한 듯하지만 원작 자체가 개정된 것은 아님).
작가가 새롭게 인기를 얻어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기존 작품들이 표지를 갈아입고 재출간되는 일은 왕왕 있었으나 그 방향이 이렇게 노골적인 적은 사실상 없었다. 이는 여러 의미에서 센세이션 했다. 두 출판사가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온라인에서 싸움 아닌 싸움이 났다. 양해를 구했다, 아니다 등의 상반된 입장 차이를 보였으나 결국 B 출판사가 표지를 정정해 출간하는 걸로 일단락 됐다(그래도 전체적인 배치도 바꾸고 형광 주황에서 형광 초록으로 표지색도바꿨다. 물론 형광 자체는 포기 못한 듯 하지만).
이런 해프닝 아닌 해프닝을 외부인이지만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나는 어딘가 씁쓸해졌다. 표절 논의에서 본문은 아예 거론도 되지 않았으며, 만약 제목이 그리 비슷하지 않았다면 B 출판사의 첫 번째 안(案)은 그대로 출간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제목, 표지이고 내용과 내지-본문-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책이란 게 존재하려면 내용과 그것을 전달하는 내지 디자인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코어-핵심-는 쏙 빼고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에 빠르게 반응하는 건 어쩐지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던 중 뭔가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경제경영 분야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내가 보고 있던 책과 그 바로 밑에 함께 보면 좋을 책(추천의 책)으로 제목만 다르고 거의 똑같은 표지가 여럿 뜨는 걸 보았다. 이에 궁금해진 나는 각 분야의 책들을 하나씩 눌러보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책표지가 추천 도서의 표지와 크게는 결이 같았다. 이는 다루는 내용이 비슷해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너무 비슷한 느낌을 줬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다른’ 양상(樣相)을 보인 건 ‘문학’, ‘인문’ 분야 정도였고, 비슷한 양상을 보인 건 ‘교재(학습, 어학)’, ‘실용(취미)’ 등의 비교적 구매 목적이 분명한 분야일수록 많이 비슷했다. 이는 책을 찾는 목적 자체가 달라서일 수도 있는데 학습서를 구입하는데 제일 중요한 요건이 디자인은 아닌 데다, 문학과 인문처럼 다루는 주제가 첨예하게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책을 직접 구매하는 독자들도, 만드는 사람들도 이미 시장에 형성된 비슷한 분위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오히려 다름에서 안정감이 아닌 불안의 요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의문이 해결되자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생각나기 시작했는데, 그럼 서점 매대에 누워 있던 많은 사람들-여유, 하기 싫어 류의 소재-은 수많은 가게 이미지 등-**가게 이야기 류-은 어떻게 된 것인가. 여기에는 창과 방패와도 같은 변명과 반박이 가능한데, 시대 흐름을 반영한 특정 주제가 유행하기 때문이다(변명)라는 주장과 특정 주제가 유행한다고 해도 모두 똑같은 이미지를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반박)이 그것이다. 굳이 창과 방패라고 한 것은 두 가지 다 말이 되고, 또는 말이 안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만드는 이의 투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참 아쉽다. 사실 이 문제는 모른 척 덮어두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결국 한 번은 고백처럼 써야 했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어떤 책의 세트 패키지 디자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 유명 작가의 베스트셀러가 새롭게 묶여 세트로 나왔다(정확히는 나올 예정이었으나 발간 직전 취소된 것으로 추정) 보색의 그라데이션에 작은 글자 한 줄. 이것도 어디서 본 것 같다. 이건 또 다른 일본의 유명 작가의 리커버판 소설 표지와 굉장히 유사하다. 표절이 자기 복제를 넘어 복제와 복사를 거듭하더니 이제는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다 베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베끼고 있다는 말 외엔 다른 표현을 할 수 없다. 북디자인을 업으로 하고 있는 나에게 이 조용한 ‘사건’은 굉장히 낯 뜨겁게 다가왔다. 자꾸만 뜨거워서 내 낯을 만지고 또 만지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나를 반성하게도 했다. 좀 더 치열하게, 좀 더 다르게, 좀 더 고민해서 했었어야 하지 않았나. 나의 지난 모든 책들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책이라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죄송하다. 앞서 쭉 말해 왔지만 이 모든 게 어쩌면 구차한 변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변명 맞다. 그래도 다르게 해야 된다. 책은 각각의 정체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는 사람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다른 건 변명이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절치부심,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좋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행동으로 열심히 머리를 모아 굴려보겠습니다. 그 결과물이 엉뚱하게 흐르게도, 그래서 책의 의도를 해치게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반성합니다! 죄송합니다!!!
*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서점 베스트셀러에서 또 한 가지를 발견했다. 주제는 다른 세 개의 책, 같은 형광 주황색, 얼추 비슷한 제목의 크기, 비슷한 높이의 띠지. 이건 표절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표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미궁 속에 빠졌다. 그렇게 코너를 돌아 여행 서적 쪽으로 갔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풍의 그림이??? 이번에는 각 가게 이미지들이 있다. 주제는 ‘일상 속을 여행하자’ 정도인 듯한데 기묘하게 주제에는 아주 잘 맞았다. 이것도 그 흔한 가게 시리즈류의 흐름으로 봐야 할까. 이는 어울리는 것도 같은데. 이것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래도! 충분히 고심을 해야 된다는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긴 하다. 모두들 반성하자! ㅜㅜ
* 이 글에 관련 기사와 이미지들이 있어 링크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출판하는 많은 사람(나 자신 포함) 스스로 알아서 반성하는 계기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