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생 우리 할머니는 나와 딱 50년 차이가 난다. '신'씨 집안의 막내딸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고, 그 시절에 여자가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졸업을 했을 정도이니 집안살림도 넉넉했다. 하지만 서울대 법학과를 나온 '전'씨 집안의 막내아들과의 결혼생활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예쁨과 사랑을 받고 자라온 할머니는 철없는 남편의 뒷바라지와 5명의 아들을 키우기까지 고생을 참 많이도 하셨다.
고학력자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권위적이셨고, 유독 할머니께 엄격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말에 거역을 할 수도 없었고 늘 낮은 자세로 열심히 할아버지 뒷바라지를 하셨다. 너무 어릴 때라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는 종종 바람도 피우셨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하기도 몇 번 하시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치셨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억척스럽게 다섯 아들을 키우면서 더욱더 생활력이 강해지셨다.
배고프던 시절 이야기는 삼촌들을 통해서 종종 들었다. 하루는 할머니가 없는 살림에 밥상을 차리면서 쌀이 부족해서 고봉밥(이 시절에는 밥은 꼭 고봉처럼 쌓았다)을 지을 수가 없게 되자 놋그릇 밑에 간장 종지를 뒤집어 넣어 숨겼다. 그 리고 뒤집어진 종지 위에 소복하게 고봉밥을 처럼 보이도록 상을 차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들이 맛있게 밥을 먹다가 밑에 깔려있는 간장 종지를 발견하면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 뒤로 삼촌들은 할머니가 상을 차려오면 숟가락을 세워서 밥그릇을 푹푹 찔러보고 종지의 유무를 확인하고는 밥을 먹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식과 손자 복이 많으셨다. 5명의 아들과 8명의 손자, 손녀들을 키워내셨으니 말이다. 아들들이 장가를 잘 가서 가정을 잘 꾸렸으면 손자들을 줄줄이 키우는 복은 없었을 텐데... 5명의 아들들은 단 한 명이라도 할머니 속을 썩이지 않은 아들이 없었다. 가장 먼저 장가를 간 둘째 아들은 이혼을 하고 두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겼다. 그리고 재혼은 해서 두 아들을 잠시 데리고 갔었지만 38살이란 젊은 나이에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손자들을 맡아서 키우셨다.
장남인 우리 아버지는 '진로'라는 회사의 영업부장으로 일을 하셨다. 그래서 밤에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가족들에게는 월급봉투만 전달되었다. 일의 특성상 술집에 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여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셨고 아주 흐릿한 기억이지만 '나'는 엄마 등에 업혀서 술집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간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억척스러운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아들 셋(사촌오빠 둘 포함)에 딸 하나를 키워야만 했다. 그러던 중 간암에 걸린 시아버지의 병간호를 함께 하며 점점 쇠퇴해지셨다. 그렇게 맏며느리는 병을 얻어 3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에 60살이 된 할아버지의 상까지 치르며 남편, 둘째 아들, 첫째 며느리를 먼저 하늘로 보냈다.
셋째 아들은 결혼을 해서 두 딸을 낳았는데 도박에 빠진 며느리와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고, 두 딸을 자연스럽게 할머니 집으로 보냈다. 넷째 아들은 그래도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하며 결혼을 하고 1남 1녀를 낳았는데 정신병력이 있는 며느리와 의처증이 도진 아들은 결국 이혼을 했다. 막내아들은 대학원까지 나와서 공부를 많이 했는데 울산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가 사회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퇴사를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이렇게 된 사연으로 우리 할머니는 5명의 자식이 성인이 되었지만 다시 손자, 손녀들을 대신 키워줄 수밖에 없었다.
손이 큰 할머니 덕분에 제사나 차례가 있으면 나는 울면서 밤새 전을 구우며 제사음식을 해야 했다. 5명의 아들들에게 음식을 모두 싸서 검은 봉지에 똑같이 담아 챙겨줘야 했기에 커다란 소쿠리에 밤새 만든 전이 가득해져야 나는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장손'인 우리 오빠는 옆에서 완성된 전을 족족 집어먹기만 했으니 정말 얄미웠다. 셋이 하면 좀 편했을 텐데 장손은 부엌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며 음식을 만들 며느리가 한 명도 없는데 어른 손녀와 밤새 제사음식을 만들었다. '나'는 고작 11살이었다. 하지만 할머니 덕분에 '나'도 손이 자연스레 커졌고 전 하나쯤는 노릇하게 구워 낼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의 '장손'에 대한 사랑은 아주 지극하셨다. 그 '장손'은 하나밖에 없는 연년생 친오빠였다. 오빠는 엄마의 부재로 인해 어릴 적에 도벽도 조금 있었고 오락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공부는 하지 않았다. 오빠가 부엌에 숨겨둔 할머니의 생활비에 손을 대도 할머니는 혼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열심히 모으고 있던 돼지저금통 밑을 칼로 그어 동전을 빼가다 들켜도 할머니는 오빠를 혼내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는 결국 군대를 갔다가 집을 나가버렸고 다니던 대학교는 재적처리가 되었다.
'나'는 공부가 재미있었다. 할아버지와의 천자문 공부가 재미있어서 그랬으리라. 그리고 오빠를 이기는 게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연년생으로 태어난 데다가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 오빠는 내 눈에는 참으로 한심했다. 그깟 산수시험을 100점을 못 받아왔으니 말이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가스나가 공부해서 오빠 앞길 막을라꼬!" 였다. 산수와 받아쓰기를 100점 받아오면 잘했다는 칭찬 대신에 할머니는 책을 찢어버리셨다. "가스나가 시집이나 가면 되지 공부를 왜 자꾸 해서 즈그 오빠 기를 꺾고 앞길을 막을꼬... " 하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신여성의 모습은 온대 간데없고 억척스럽게 아들과 손자, 손녀를 키우시면서 '장손'에게만 집착하는 할머니로만 남으셨다. 학원은 오빠만 다닐 수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다니고 있는 피아노 학원을 나도 다니고 싶었지만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교회에 가면 무료로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고 하니 왜 밥 먹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몰랐지만 피아노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할머니께 비록 많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할머니 덕분에 손이 커졌으며, 생활력이 강해져 억척스러운 사람으로 자라났다.
우리 할머니는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고생만 하시다 대장암 합병증으로 병원에 결국 입원을 하셨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꼽고 계시면서 13일 동안 의식이 없으셨는데 매일매일 오늘이 고비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할머니 곁을 매일 밤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전부였던 '장손'인 우리 오빠가 13일 차에 드디어 병원에 왔다. 오빠가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의식도 없었던 할머니는 그날 밤 꿈에 그리던 '장손'을 만나고는 고된 삶을 끝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