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는 점점 가족들과 멀어져 갔다. 생활비는 할머니께로 보내주셨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보기 힘들어졌다. 가끔씩 소식을 전해올 때쯤엔 오늘부터 '엄마'라고 부르라며 새어머니를 데려오셨다. 그래도 엄마의 사랑을 원했던 나는 새어머니에게 이쁨을 받으려고 아줌마가 아니라 '엄마'라고 스스럼없이 불렀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버렸을까? 나는 어른들의 삶 속에 빠르게 적응하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할머니와 사는 것보다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서 고3 졸업을 앞두고 대학교를 아버지 집과 가까운 곳으로 지원을 했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의 계획대로 아버지, 새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싶었던 나의 소원은 이렇게 스스로 이루어냈다.
첫 번째 새어머니는 아버지와 꽤 오래 함께였는데 아버지가 생수 사업을 하실 때 돈문제에 얽히더니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들고 도망가 버렸다. 새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다. 내가 아버지집으로 오는 바람에 생활비가 부족해졌다며 아버지와 늘 내가 보는 앞에서 싸우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시면 내손에 과도를 쥐어주고는 기찻길 옆에 가서 저녁에 먹을 쑥을 뜯어오라고 했다. 기찻길옆에서 쑥을 뜯다 보면 '아, 이러다 기차가 지나가다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바구니 가득 쑥을 캤다(나는 목표달성형 인간이었다). 아들만 둘이었던 새어머니는 내가 아무리 살갑게 다가가도 선을 그으셨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쑥이 너무 싫다.
두 번째 새어머니는 아마 호프집에서 만나신 듯하다. 전라도가 고향이신 분이었는데 할머니는 애초에 전라도 여자에게는 정을 주지 말라며 언젠가는 뒤도 안 보고 떠날 거라고 하셨다. 그래도 두 번째 새어머니는 굉장히 살갑게 나를 대해주셨고 나도 그런 새어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잘 따랐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호프집을 차려달라는 요구 등에 갈등을 빚어오다가 할머니의 예언(?)처럼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셨다. 하지만 두 번째 새어머니는 대학교 졸업식에도 와주셨고 심지어 내가 24살에 결혼을 했을 때도 부모님의 자리에 앉아주셔서 감사한 마음도 든다. 결혼식 때 엄마 자리에 할머니가 앉아야 되나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새어머니도 아버지를 떠나셨고 떠난 지 2년쯤이 지났을 때 엄마라고 하며 전화와 문자가 왔었는데 생활비가 없다고 돈을 빌려달라고 하셨다. 조심스럽게 새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세 번째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당근밭에서 데리고 왔다고 했다. 세 번째 새어머니는 그래도 사람이 좀 순했고 엄마의 제사까지도 챙겨주셨다. 그래서 우리엄마 제사날에는 같이 음식도 하고 제사도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가 노름을 시작하면서 새어머니와의 갈등이 점점 심해져 갔다. 새어머니는 나에게 전화하는 일이 잦아졌고, 아버지가 노름방에 가서 돈도 많이 잃고 연락도 안된다며 같이 찾으러 가자는 연락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는 노름으로 인해 열심히 일하며 번 돈을 다 날리셨고 결국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더니 세 번째 새어머니도 어느날 홀연히 사라지셨다.
세 번째 새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네 번째 새어머니가 아버지 곁에 있을 땐 나는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의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우리 아버지는 남자로서의 매력은 전혀 없다. 50대부터 흰머리가 많아서 다들 60넘은 노인으로 보기도 했었고 치아관리를 잘하지 않으셔서 이빨도 많이 빠져있는 데다가 술만 먹으면 성질머리가 장난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대학교를 다닐 때 같은 과 언니가 과제 때문에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점심때 집에 오셔서 "거복아, 라면 하나 끓여라!"라고 하자 언니가 "아버지 화나셨나?"라며 깜짝 놀란 듯 아버지 눈치를 보며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경상도가 고향인 아버지와 딸의 평범한 대화였는데 말이다.
본처와 사별을 하고도 4명의 여자들과의 삶을 살아가고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노름으로 날리는 아버지가 나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다는 나의 꿈은 아버지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전문대를 졸업할 때쯤 교수님께서 4년제 대학으로 편입을 권해주셨다. 학업을 포기하기에 성적이 아깝다며 동아대학교에 추천서를 넣어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4년제 편입을 의논드렸는데 "등골 좀 그만 빼라"라는 한마디에 곧바로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해버렸다. 아버지는 낳아주고 키워줬으니 늘 돈으로 갚으라고 하셨다. '다른 집 딸들은 결혼할 때 집을 사주더라, 차도 사주더라'라고 늘 말씀하셨다(이것이 바로 가스라이팅인가?). 그래서 나는 첫 직장에서 2년 동안 일하면서 모은 2천만 원을 아버지께 드리고 내 가정을 꾸리기 위해 24살에 결혼을 하면서 아버지의 집에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천만 원짜리 수표 2장을 은행에서 찾아와 아버지께 드릴 때 빚쟁이에게 빚을 다 갚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최근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연락은 2019년 11월에 오백만 원을 입금하라는 문자였고 나는 아직도 이 문자를 지우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물론 입금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4명의 새어머니를 겪으면서 나는 하루하루 더 단단해졌다. 쑥도 캘 수 있게 되었고(?) 1년에 천만 원씩 저축도 해봤다. 만들어진 파워 E의 성향으로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어색함이 없는 성격이 되었다. 그때 대학 편입을 반대한 아버지 덕분에 사이버대학을 다니며 못다 한 공부도 하고 있다. 나에겐 너무나도 간절히 필요했던 가족이었지만 내 삶을 가장 힘들게 한 것도 바로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