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_ 피터 레이놀즈 그림책, 문학동네
미술 시간, 베티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어요. 정확히는 그리지 못했지요. 선생님은 아무것이나 그려 보라고 했어요. 베티는 부루퉁하게 점 하나를 찍었어요. 선생님은 점을 찍은 종이에 베티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어요. 다음 미술 시간, 베티가 찍은 점 그림은 멋진 액자에 담겨 교실 벽에 걸려 있었지요.
베티는 액자에 걸린 점보다 훨씬 멋진 점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수채화 물감을 꺼내서 점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베티는 다양한 색으로, 다양한 크기의 점들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어느 순간에는 점을 그리지 않고도 점을 표현했지요. 얼마 후 학교에서 미술 전시회가 열렸고, 베티의 점 그림은 인기가 대단했어요.
전시회에서 한 아이가 베티에게 다가와 베티처럼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고 말했어요. 베티는 그 아이에게 도화지를 내밀며 한번 그려 보라고 응원하지요. 아이가 비뚤배뚤하게 선을 그리자, 베티는 이렇게 말했어요.
자!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점>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아기 편집자 시절이었다. 선배들은 모두 자기 몫 이상의 일을 해내는 데, 나는 뭘 해도 어설펐던 시절이었다. 처음 하는 일이니까 당연히 어설픈 것인데, 나는 그런 내 모습이 굉장히 싫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주제로 기획을 하는 데 나만 영 못 따라갔다. 아는 척을 해 보려고 해도, 진짜 아는 게 없으니 뭐가 잘 되지 않았다. 나의 다정한 선배들은 항상 나를 응원해 주고, 뭐가 되도록 도와주었는데도 나는 좀 삐딱했다. 한 번씩 과장님한테 빈약한 논리로 대들기도 하고, 책상에서 키보드를 괜히 탁탁 두드리기도 했다. 꼭 <점> 속의 베티처럼 말이다.
베티는 아기 편집자 시절의 나처럼 세상에 잔뜩 화가 났다. 사실은 세상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알려 줘도 제대로 못 해내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나에게 못되게 굴다가, 이제는 세상에도 못되게 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정한 미술 선생님에게도 한껏 화를 냈지만, 진짜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잘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점 그림이 교실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베티는 달라진다. 세상에 화를 내고 툴툴거리지 않고, 보여 주기로 한다. 점 하나 그리는 것, 그건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결국 베티는 자신만의 그림을 찾아낸다. 이렇게도 그려 보고, 저렇게도 그려 보면서 점 그림에 있어서는 모두가 부러워하게 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물론 나는 베티처럼 누구나 부러워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툴툴거리지 않고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서 나를 끊임없이 증명해 냈다. 다정한 선배들이 이끌어 주는 대로 따라가 보고, 큰 소리로 대들다가도 귀 기울여 듣게 됐다. 세상이 다 틀렸다고 징징거리다가도 금방 되돌아와서 나만의 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나고 나니, 나도 베티처럼 나를 부러워하는 후배들에게 “자!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하고 말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기게 되었다.
만보에게 이 책을 읽어 주면서, 추천의 말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화가가 될 수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추천사에는 따뜻한 시선, 작은 칭찬 하나가 훌륭한 예술가를 만들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여전히 책을 짓고 있고, 그 일을 좋아하는 것이 그 옛날 다정한 선배들의 응원 덕분인 것처럼 말이다.
만보도 이 책을 참 좋아한다. 만보에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많은 순간들이 있다. 어떤 그림을 따라 그리고 싶었는데 잘 안 될 때, 선을 똑바로 긋고 싶었는데 비뚤어졌을 때, 무지개를 그리고 싶었는데 원하는 색을 만들어 낼 수 없을 때 등등. 그럴 때마다 만보는 베티처럼 화를 낸다. 가끔은 뭔가를 집어던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엄마나 아빠의 응원을 받으면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하려던 것을 해낸다. 물론, 엄마 아빠의 작은 터치가 더해졌을 때도 있지만. 그런 순간들을 만보도 충분히 겪었기 때문에 베티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리고 베티가 자신을 부러워하는 아이에게 자신이 받았던 응원을 돌려주는 장면에 집중했다. 자신도 그런 어른스러운 순간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만보랑 그림 그리기를 하고 나면 그림에 꼭 이름을 쓰게 한다. 때때로 그림이나 만들기 작품들을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기도 한다. (물론 모든 것들을 전시할 수는 없어서 몰래몰래 정리할 때도 많지만.) 그러면 만보는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화가, 예술가가 된다. 집에 오는 손님들마다 만보의 작품을 감상하고, 칭찬의 말을 남긴다. 만보가 만약에 예술가가 된다면,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서가 아닐까!
누구나 처음 하는 일들, 익숙하지 않은 일들을 해내기 어렵다. 해내지 못하는 것에 짜증이 나고 화도 난다. 하지만 따뜻한 시선과 응원이 있다면 새롭게 시작해 볼 수 있다. 3월 3일, 이사로 인해 새로운 유치원에 입학하는 만보를 위해 이 책을 다시 꺼냈다.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유치원에서의 일들이 많이 낯설고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언제나 엄마, 아빠가 만보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해 주려고 한다. 그저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 줄 엄마, 아빠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려고 한다. 만보, 언제나 엄마가 응원해!
<점> 그림책은 펜으로 그린 간결한 그림에 약간의 채색만 되어 있다. 다양한 배경도, 화면을 꽉 채우는 그림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책이다. 장 자끄 상뻬 작가의 간결한 그림 스타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그림책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낄 것이다.
카테고리: 창작 그림책 (해외)
추천 연령: 5세 이상
관련 주제: 그림, 유치원/학교 생활, 자기 효능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