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볶음밥을 했다.
파를 볶아 기름을 낸 후 불고기 양념한 것과 적당히 신 김치를 넣어 볶았다. 짜지도 맵지도 느끼하지 않게 간이 딱 맞았다. 아이를 깨워 접시에 담아준다.
"엄마, 뚝불 냄새가 나네요?"
이렇게 묻는 이유는 어제 아침에 해준 뚝불고기를 오늘 또 했냐는 물음이거나, 어제 했던 남은 뚝불고기 재료를 재활용하지 않았냐는 뜻이다.
이런 일은 자주 있어왔다. 아이는 하루 전에 먹었던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또, 하루 전에 먹었던 음식의 재료를 활용해 만든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거나 다른 음식으로 바꿔줘야 먹는다.
"엄마? 어제저녁까지 보이던 뚝배기가 저기 씻어져 엎어진 걸 보니 아무래도..."
하루 전에 먹은 뚝불고기를 활용해 볶음밥을 한 게 아니냐라는 의심의 말이다. 이럴 땐 분노 게이지가 머리끝까지 올라가지만, 이 말에 대구를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꾹 눌러 참는다.
음식을 재활용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남은 음식을 버리는 게 환경에 악영향을 준다고 해도 소용없다. 굶는 아이가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지는 수도없이 말한 것 같다. 아이의 머리엔 남은 재료를 사용해 만든 음식을 절대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이럴 땐 나도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카드를 내민다. 음식물 통을 열어 버린 뚝불고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머니~~!! 알았어요. 알겠다고요. 먹는다고요. 얼른 닫으세요."
나도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김치볶음밥에 김가루를 뿌려 아이 앞에 내미는 걸로 상황을 마무리한다.
음식을 먹겠다고 했을 때, 다시 남은 음식을 재활용해서 만드는 건 요리사들의 창의적인 활동이라는 둥, 식재료 값이 얼마나 비싼지 알고 있느냐는 둥 말을 덧붙이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비슷한 일로 아이와 수도 없이 언쟁을 해왔으니까.
아이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식탁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며 말한다.
"아이고... 똥강아지가 또 음식을 남기셨네... 우리 똥강아지 음식 남기면 안 되지?"
아이는 음식을 남긴 게 미안했나보다. 내가 할 말을 대신해준다.
밥을 먹을 때 위와 비슷한 일들로 아이와 많은 언쟁을 해왔다. 하지만 해결된 건 없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바쁜 아침에 아이가 좋아하는 알밥을 해줬는데 식탁에 앉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이유인즉슨 아침에 계란을 안 먹으려는 아이에게 알밥 위에 지단을 채 썰어 얹어줬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나름 가늘게 채를 썰어 몇 개 얹어준 게 사달이 난 것이다.
아이가 계란을 안 먹으려는 이유는 올 초부터다. 장이 예민한 아이가 계란찜을 먹고 간 날, 학교에서 방귀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종일 방귀가 나와서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아이는 계란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 계란뿐 아니라 다른 음식도 가스를 만들 수 있고 그날의 장 상태에 따라 다르다, 꼭 계란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해줘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본인이 알아본 바, 계란은 확실한 가스 형성 음식이라며 더욱 계란을 멀리했다. 나는 성장기에 완전식품인 계란을 안 먹으려 하는 것이 방귀를 뀌어 민망한 것보다 훨씬 손해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침에 간단히 먹기 좋은 활용도 높은 계란을 안 먹겠다고 선언을 했으니 여간 부아가 나는 게 아니었다. 전날 밤늦게 먹은 과자, 저녁에 바깥에서 먹고 오는 햄버거, 각종 음료수가 계란보다 독한 가스가 나올 거라며 독하게 말을 해줬다. 그래도 아이는 절대 듣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버섯에 이어 계란도 안 먹게 되었다. 계란을 먹는 날은, 학교에 안 가는 날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알밥에 지단을 얹어준 날, 아이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어머니, 혹시 채식주의자 알아요?"
"알지, 우리 집에도 책 있잖아.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 책"
"그거 읽어보셨어요?"
"그럼 읽어봤지."
"읽어봤다면 아실 텐데요... 음식을 강요하는 게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강제로 쑤셔 넣는 거와 권유는 다르지."
"어머니가 지금 하는 게 권유가 아닐 텐데요. 그것은 강요, 말하자면... 더 잘 아실 텐데요...?"
"알았어. 그럼 계란만 빼고 먹도록 해. 아니면 빵을 먹든지..."
"네"
아이가 욕실로 들어가고 나서 싱크대에 넣어 둔 뚝배기를 보니 채 썬 계란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먹은 것 같았다. 계란 프라이를 얹어줬으면 분명 먹지 않았겠지만, 얇은 지단 몇 가닥을 남기는 게 무안했기에 그냥 먹어버린 것 같았다.
아이가 다섯 살 때, 유치원에서 좋아하지 않는 버섯을 강제로 입에 넣어 토한 일이 있었다. 그날 후로 아이는 버섯만 보면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다. 원래는 버섯을 먹었던 아이인데 그 후로 버섯을 먹지 못하는 건 물론, 그렇게 좋아하는 피자에 들어간 버섯조차 빼고 먹게 되었다. 버섯에 대한 혐오는 갈수록 더해져서 우리 집 모든 음식에서 급기야 버섯이 퇴출되기까지 했다.
예민한 아이들이 편식을 하는 것은 감각이 예민해서인 경우가 큰데, 당시 유치원에서 아이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음식을 먹이는 데에만 급급했던 방식이 오히려 아이에게 좋지 못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음식을 먹는 환경과 음식을 접하게 해주는 사람은 중요한 것 같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접하고 권유해 주는가는 무척 중요한 것 같다. 특정 음식에 대한 거부가 오랜 기간 이어진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평생 안 먹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세상엔 버섯과 계란 없어도 먹을 게 많다.
나는 퇴직 후 '귀산'을 하면 버섯을 따거나 버섯을 재배해 보고 싶은 꿈이 있는데 그땐 아이가 어른이 되어있을 것이다. 버섯을 안 먹는 아이와 함께 버섯 채취를 꼭 해보고 싶다.
암튼, 한강의 기적이다. 내가 음식을 아이에게 강요할 때마다 '채식주의자'가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