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사춘기

괴롭힘과 외모

by 붉나무

고등학생이 된 둘째 아이가 학원 가 어느 건물을 지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여기서 작년에 어떤 애가 자살했잖아요.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애들이 학폭으로 자살하는 경우가 많아요. 학폭은 끝나지 않아요. 117 신고요? 그걸로 절대 해결되지 않아요.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며 괴롭히기도 하고 학교로 찾아오고요. 절대 끝나지 않아요.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끝나겠죠.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선생님도 부모도 알지 못하게 괴롭히죠. 그래서 그런 아이들은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학교에서 해결해주지 못해요. 그냥 겉으로만 해결해 주는 척하는 거예요. "

"그래도 감당하기 힘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부모에게든 117이든 도움을 청해야 해. 그래야 도움을 줄 수 있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해결에 도움이 되는 일이 더 많거든."

"물론 해결이 되는 것도 있겠지만요. 자살하는 애들은 끝이 없다는 걸 알아서 죽었을 거예요. 누군가가 그 애가 바라는 방식으로 도와주는 어른이 없었겠죠. 그 애들은 착해서 죽는 거예요. 근데 혹시 저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 죽을 마음이면 그 마음으로 독하게 살아보는 거예요. 죽는다고 괴롭힌 애도 죽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 최고의 복수는 내가 살아내서 힘이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보란 듯이 잘 살아내는 거지"

"그런데 그걸 참기 어려우니까 죽는 거겠죠."

"그럴 테지. 그러나 죽음으로 해결된다 생각하는 건 일시적 문제를 영원한 해결책으로 해결하려는 격이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남기게 되잖아?"

"살며 어떤 나쁜 일은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단다. 그건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야. 근데 지나 보면 힘들었던 일이 언젠가는 과거가 되어있어. 물론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일례로 코로나 때 마스크 쓰는 게 그랬잖아. 끝날 것 같지 않았지만 결국 끝이 났지. 어떤 건 몇 년이 걸리기도 하지. 어른이 되어서 지속되기도 하고 평생을 가기도 한단다. 가난과 공부, 친구 문제 등 그런 것들도 그래. 뭔가 나에게만 연속적 불행이 닥치는 것 같을 때가 있지.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게 저절로 해결이 되기도 하고 귀인을 만나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닐 땐 시간이 많은 걸 희석시켜 주기도 하더구나. 시간의 힘을 믿어보는 거 엄마는 그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모든 고통은 끝이 없는 것 같지만 어떤 식으로든 끝이 있지. 그래서 '끝'이란 단어가 있는 거잖아?"


둘째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초등학생 때 괴롭히던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격주 등교를 하던 때라 가뜩이나 등교를 싫어하던 아이가 등교하자마자 그 아이로부터 괴롭힘을 받게 되며 더 괴로워했다. 다행히 아이가 집에 와서 그 일을 말을 했고 나는 담임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히 담임교사가 그 아이를 상담하고 지도하여 괴롭힘을 해결해 주셨다. 이후 학기 초 담임선생님의 신속한 대처와 지속적인 관심이 얼마나 아이에게 중요한지 알게 됐다. 아이는 이후 중학교 생활을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둘째 아이는 중1이 되자마자 학교 가기 싫다는 말로 괴로움을 호소했었다. 나는 아이가 코로나 유행으로 인한 격주 등교가 원인이라 추측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건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알았다. 중학생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일일이 말하는 게 남자아이들끼리는 마마보이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늘 말했지만, 큰 아이는 그런 사소한 것들을 혼자 알아서 대처하고 해결해야지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게 아니라며 동생을 나무랐다. 동생이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불편했던 감정을 표현하면 오히려 혼을 내곤 했기에 중학생이 된 둘째는 꾹 참고 있다가 결국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로 표출된 것이다.


아이마다 기질과 성향이 다르기에 아이와 대화하는 방식도 고민을 이야기하는 법도 다른 것 같다.

기질이란 좋고 나쁜 것이 아닌, 타고난 것이기에 감각적으로 예민한 아이는 사소한 것들에도 반응할 수 있다.


둘째 아이는 수강자가 많아 복작대는 학원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장시간 아이들 틈에서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학원 원장님의 앙칼진 목소리를 듣는 것이 힘들어 결국 학원을 그만두었다. 학원을 그만둔 결정적 이유는 원장님의 오해와 학원 분위기가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그 학원을 그만두게 한 게 정말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또래보다 뒤늦게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중 2 때 처음 간 학원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아이들이 복도에 둘째 아이를 세워놓고 통행을 막은 것이다. 아이들에게 비켜달라고 했지만 그 아이들은 계속 길을 막았다고 한다. 하지 말라고 하는 과정에서 서로 몸을 밀치는 소란이 있었고 그러면서 수업시간에 늦었단다. 늦은 아이들을 원장이 불러 한꺼번에 야단을 친 것이다. 아이가 학원에 가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다. 아이는 그 상황을 원장한테 말했지만 원장은 들으려 하지 않고 소란하게 했다, 수업에 늦었다는 이유로 괴롭힌 아이들과 함께 야단을 친 것이다. 아이는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려 했고, 억울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휴대폰을 꺼내서 봤다는 것이다. 그러자, 원장은 훈계를 하는데 휴대폰을 꺼내본다며 더 혼을 냈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는 너무 억울해서 더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되어 집으로 가겠다며 가방을 쌌다고 했다. 아이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학원 원장님으로부터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마치 둘째 아이가 굉장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본인이 참았다는 뉘앙스로 말을 했다.

OO가 소란을 피워 야단을 쳤다. 야단치는 과정에서 휴대폰을 봤다. 그래서 태도에 대해 혼을 내니 집에 가겠다고 나갔다. 집에 오면 아이와 잘 이야기해 보시고 내일 다시 학원에 보내주시라,는 내용이다.

나는 일단 원장의 말을 모두 들었다. 그리곤 소란을 피웠다면 죄송하다 아이가 들어오면 대화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학교에서 소란을 피워 전화를 받은 일, 태도 불량으로 전화를 받은 일도 없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는 울먹이며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 오늘 너무 억울해요. 집에 갈래요!"

"그래도 수업 중간에 그렇게 뛰쳐나오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원장님이 훈계를 하는데 휴대폰을 본 것도 그렇고. 어쨌든 소란을 피웠으니 원장님이 혼내지 않았겠니? 잘못하지 않은 걸로 혼내진 않았겠지"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이는 더 억울해했다.

"엄마? 엄마는 원장님 말만 믿는 거예요? 왜 내 말은 안 들어봐요? 그럼 원장님한테 CCTV확인하라고 해주세요. 딱 한 번만요. 그럼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될 거라고요! 엄마라면 아들 말을 믿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가 이렇게까지 말한 건 처음이기에 나도 아차 싶었다.

"그래, 알았어. 네가 억울해하는 걸 보면 그렇게 부탁드려 볼게. 마음이 가라앉으면 네가 결정해서 학원에 다시 가든 집으로 들어오든 하자."

"네, 편의점에서 쉬었다가 갈게요."


아이가 들어오기 전, 학원 원장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저희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억울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CCTV를 꼭 확인해 주세요. 확인 후 만약 저희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원장님께 꼭 사과드리라고 하겠습니다. "

그날 밤에 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CCTV확인을 해보니 다른 아이 2명이 OO의 길을 막는 게 찍혔다. 그 아이들이 괴롭힌 게 맞다, 내일 등원시켜 주면 잘 다독이겠다고 했다.

나는 그날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이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거짓말하는 아이들과 원장의 말만 들었으니까. 이렇게 어른의 잘못된 상황 파악이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모두를 퉁쳐서 다수의 이야기만 듣고 혼내는 건 얼마나 억울한 상황을 만들고 아무 잘못이 없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멀쩡한 아이를 나쁜 아이로 만드는지 모른다.


나는 그날 밤에 학원에 처음 상담받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고 나서 그 학원을 그만두자고 아이와 이야기했다.

그 학원은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을 감시하며 자습을 시키고 다닥다닥 좁은 공간에 많은 아이들을 빽빽이 앉히고 화장실만 가면 째려보던 원장의 눈빛.

등원 첫날 아이가 학원에 갔을 때 의자도 마련해주지 않은 학원이란 걸 뒤늦게 아이로부터 들었다.


그렇게 아이는 중학생 때 잠깐 학원을 다니다 중학생을 마치도록 공부학원을 끊었다. 아이 또한 보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공부는 학원을 다닐 때나 그만두었을 때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아이는 휴대폰 게임에 빠졌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아이를 빠져나오게 하고자 아이가 그토록 조르던 강아지를 입양하고, 드럼 학원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는 드럼에 한동안 빠져 열심히 다녔고 학교 예술제에서 드럼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여기저기 그림을 그렸다. 종이만 있으면 게임 캐릭터부터 친구들 등을 여기저기 그려놓았다.


나는 오감이 예민한 아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아이의 진로를 미술계열로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중2 여름방학부터 아이는 미술학원에서 입시미술을 시작했다. 아이말로 '입시'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자신은 '입시 미술 해볼래?'라는 엄마의 말에 그냥 단순히 더 열심히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했기에 '알았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걸 중3 여름에 알았고, 이미 자신이 하고 있는 그림이 입시미술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는 것인데 되돌리기엔 학원비가 아깝다는 생각과 엄마가 실망할까 봐 그냥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미술 학원에서도 뒤늦게 입시미술을 시작한 아이는 같은 반 여자아이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했다. 그건 아이가 예고에 합격한 다음 엄마에게 쓴 편지로 알게 되었다. 편지내용은 이러하다.


엄마, 저는 예고에 합격하고 정말 기뻤어요. 그런데 제가 뒤늦게 입시반에 합류하면서 먼저 하던 애들이 저를 무시했어요. 제 그림을 보고 킥킥거리고 수군댔어요. 걔네들은 먼저 시작했으니까 당연히 잘할 수밖에 없죠. 초등학생 때 시작한 애들이라고요. 근데 제가 지들보다 잘 못한다고 비웃었어요. 저는 선생님한테도 혼이 났어요. 그래서 저는 정말 열심히 그렸어요. 그러다가 입시를 얼마 안 남기고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아오자 애들이 의아해했어요. 당연히 자기들이 더 잘 그렸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중 한 아이는 선생님께 울며 억울하다고도 했어요. 하지만 그 대회는 학원에서 여는 대회도 아니고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한 대회인데 학원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공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자신이 더 잘 그렸을 텐데 왜 제가 상을 받게 됐는지 억울해했어요. 저는 그날 진짜 열심히 그렸거든요. 그 뒤로 여자 애들이 저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어요. 저를 무시하지 않았어요. 저는 연습할 때 계단에서 울기도 했어요. 친구들보다 그림이 잘 안 됐거든요. 그런데 그날 속으로 웃음이 났어요.

둘째 아이는 중학생 때까지 내내 작았다. 마르고 작고 피부는 검은 편, 그런 외모를 보고 아이들이 종종 수군대며 놀리기도 했다는 걸 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존감을 살려주려 외모를 그렇게 말하는 애들이 오히려 자존감이 떨어지는 애들이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자신이 더 우월한 사람이라 착각하는 것 같은데 결국 자기가 형편없음을 제입으로 말하는 격이라고. 아직 마음이 자라지 못해서 그런 거다.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으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말하고 무시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우리나라처럼 외모를 중시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나는 남자아이들은 외모에 있어 좀 더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자아이들끼리도 여자 아이들처럼 외모에 대한 평가가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결혼 전까지는 외모에 대한 지적을 수도 없이 받아왔다. 남녀를 불문하고 내 외모에 대한 지적을 했다. 키는 큰데 얼굴이 안 따라준다, 입이 튀어나왔다, 눈이 올라갔다, 코는 뭐 그렇다, 얼굴만 예뻤으면 몸은 봐줄 만하다 등등... 그때그때 여러 방식으로 외모에 대한 지적을 감내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여자로 사는 건 이런 걸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 화나고 답답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남자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아이를 양육하면서 다시 또 느끼는 요즘이다.


그놈의 외모, 근데 직장생활 오래 하다 보면 우리나라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살기 좋은 나라임에는 분명하다. 오래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다수가 호감 가는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 더 친절한 걸 볼 수 있다. 그러니 남녀노소 불문하고 외모, 외모 하는 거다. 나는 내가 호감 있는 외모가 아니라서 그런지 평생 외모로 사람을 가르고 가리진 않은 것 같다. 예쁜 사람에게 예쁘다고 칭찬도 잘 안 한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칭찬하면 다른 사람이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걸 수도 없이 느껴본 사람은 여럿이 있을 때 이쁘고 잘생긴 사람의 외모를 칭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못생겼다 말하는 사람에겐 장점을 많이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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