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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존책방 Jan 06. 2022

예민 보스, 약점을 들키다

부모를 원망하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내 마음

생일날 아침, 엄마에게 일찍부터 전화 왔다. ‘아 생일이라 축하한다고 하려나보다.’ 전화를 받았다. “밥은 먹었니?” 물으시더니 본인 병원 간다는 엉뚱한 이야기만 하다가 뚝 끊었다. 결국 축하 인사는 받지 못했다. 조금 화가 났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 엄마는 직접적인 표현을 낯부끄러워한다. 알면서도 여전히 난 엄마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나 보다. 바보같이. ‘기대’라는 단어는 나에게 멍청한 단어다. 늘 내 속마음은 숨겨야 했고 엄마의 기분과 장단에 맞춰야 했다.


감정은 에너지다. 억압한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억압된 에너지는 점점 더 커진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억압하며 살아가야 한다. ‘존 브래드 쇼’는 <가족>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진정한 감정과 접촉하게 될 때, 그 감정을 표출하려는 에너지가 없어진다."


어려서부터 차가운 엄마의 눈빛과 언어를 몸으로 겪어야 했다. 방어할 기회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부모에게 착한 아들로 사는 것이 생존 방법이었다. 감정은 공감받지 못했고 욕구를 말하는 건 잘못으로 치부됐다. 지금도 욕구를 느끼면 죄책감을 느낀다. 감정 조절이 어려울만큼 분노에 휩싸일 때마다 안 그런 척 했다. 내 안의 슬픔을 대면하기엔 너무 두렵고 아플 것 같다. 억압된 감정은 모든 관계에서 예민하게 드러났다. 예민함을 내 성격으로 받아들이고  ‘까칠한 사람’이라고 광고하며 자신을 보호하며 살았다. 처제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형부는 예민 보스같아요!”


가정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아내와 자녀에게는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 가시에 계속 찔리는 가족들은 아파했다. 내가 달라져야 했다. 항상 날선 말투와 경멸하는 눈빛으로 아내를 대했다. 아내를 향한 분노는 어머니를 향한 감정이었고 어머니와 풀지 못한 숙제를 아내를 통해 풀려는 시도였다. 사실 사랑받고 싶었던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자꾸 가시를 세웠던 이유는 사랑받고 싶은 갈망 때문이었다. 이 사랑은 아내가 아닌 바로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의 부재가 내 불안함과 예민함을 증폭시켰다. 아내와 싸우고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치부를 들킨 것처럼 패닉 상태가 된다. 상대방 감정은 안중에도 없어지며 대화를 멈추고 그냥 숨고 싶어진다. 다스리기엔 너무 공포스러운 감정이다. 나는 이 감정을 대면하기 두려워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글로 쓸 때도 에너지가 여간 드는 일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예민 보스의 약점을 들켰다. 꽤 기분 좋은 애칭이다. 어차피 예민할거면 보스 정도는 해야지.




엄마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받고 싶다고해서 받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인정하기엔 너무 슬플 것 같다. 하지만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은 이미 지나갔으니 애도해야 한다. '내가 그랬구나. 내가 참 엄마의 사랑을 갈망했구나.' 숨기며 사는 것이 이제는 더 고통이라는 것을 배웠다. 늘 내면의 부대낌을 피하려고 연기하고, 예민하게 가족들을 통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다. 결국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다. 낯설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을 한다. 성장이 멈췄던 내면아이는 이제 용기를 내어 걸음마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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