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과하는 법을 모른다.

by 인생짓는남자

신애 :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요?”
도섭 :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전도연, 송광호 주연 영화 <밀양>의 한 대목이다. 아들을 잃은 신애와 신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 도섭이 나눈 대화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이 장면에서 신애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함께 분노를 터트렸을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용서하려던 신애와 사죄해야 할 도섭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도섭은 신애 앞에 무릎 꿇은 뒤 신애가 용서할 때까지 머리를 땅에 찧고 피를 철철 흘리며 용서를 구해도 시원찮은 입장이다. 그런 자신이 이미 용서받았다고? 신애에게 사죄해야 함에도 엉뚱한 데 사죄하고 용서받았단다. 당사자인 신야에게 사죄하지 않고도 당당하다.

신애는 도섭의 사죄를 받아야 할 입장이다. 도섭이 그녀를 수만 번 찾아와 용서를 구해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임에도 신애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용서하기 위해 억만 근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사죄는 바라지 않는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해도 용서할 그녀다. 그런데 사죄는커녕 엉뚱한 고백을 한다. 자신은 이미 용서받았단다. 이게 무슨 기가 막힌 상황인가? 신애가 신을 원망하고, 삐뚤어질 만하다.

이런 일이 영화에서만 벌어지겠는가. 실제로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실제로 누구나 겪는 일이다. 유괴와 살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용서 혹은 사죄와 관련된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 다른 모습으로 겪긴 하지만, 일상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사과는 사과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 해야 한다. 사과하는 사람 입장에서 하면 그건 사과가 아니다. 사과하는 사람이 마음을 다해 사과해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변명처럼 느껴질 뿐이다. 남녀 사이에서 그런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나도 사람인지라 가뭄에 콩 나듯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아내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때 나는 사과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곤 한다. 내가 잘못한 걸 나도 아니까 굳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내가 넘어가 주길 바란다. 곧장 미안하다고 말하면 해피 엔딩이 될 텐데 굳이 갈등을 만든다. 쓸데없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전부 거친다.

잘못한 걸 알면 사과하는 게 옳다. 하지만 사과하려니 너무 쑥스럽고, 멋쩍으며 부끄럽다. 그래서 아내가 쿨하게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과한 욕심을 부리며 시간을 끈다. 사과를 미루고 미룬다. 그럼 아내는 점점 화가 난다. 바로 사과하면 시원하게 넘어가 주어야지, 생각했다가도 내 행동에 화가 치솟는다. 결말에 가서는 용서해 주긴 하지만 절정에 다다른 순간에는 아무리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는다.

절정 단계에서 사과할 때는 굳이 사족을 단다. 아내가 설명해달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왜 그랬는지 애써 설명한다. 그럼 아내는 속이 터진다. 사과 한마디면 되는데 왜 자꾸 에둘러 가냐고. 결국 마음 넓은 아내가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지만, 산을 내려오기까지 굽이굽이 돌고 돈다. 시간을 한껏 낭비하고, 체력을 양껏 소모한 후에야 겨우 내려온다.




우리는 사과가 서툴다. 서툴게 사과한다. 누군가에게 잘못한 게 있으면 그에게 가서 그저 “미안하다”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한다. 억울해서 그런 게 아니다. 잘못한 걸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저 멋쩍어서일 뿐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곧바로 하기에는 민망해서 돌아가는 것뿐이다. 민망함을 없앨 시간을 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미안한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사과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는 겸연쩍어서 그럴 것이다.

사과하는 사람의 심정이 어떻든, 이유가 무엇이든 사과할 때는 곧장 목적지로 향하는 게 좋다. 시작부터 곁길로 빠지면 좋지 않다. 돌아가면 역효과가 난다. 사과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앞서 말했든 핑계 대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다른 말로 사과를 시작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지막 지점에 가서 사과를 하더라도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사과를 먼저 한 후에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본전도 못 찾을 수도 있는데 설명 먼저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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