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 그의 말을 이렇게 바꿔 보고 싶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아니, 나는 혼자 살 수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바로 나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만큼은 전혀 사회적이지 않다고, 나는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확신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을수록 그건 그저 치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애써 부인하며 살아왔지만, 실은 나도 굉장히 사회적인 존재라는 사실, 결코 혼자 살 수 없음을 점점 느끼고 있다. 두 가지 면에서 말이다.
무인도에 살지 않는 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다. 다른 사람과 일정량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친분을 쌓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적 접촉 혹은 도움받는 걸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다른 사람과 관계하지 않고 혼자 살 수 없다. 누군가 홈리스(homeless)가 있지 않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아니. 홈리스조차 예외가 될 수 없다.
사회성 면에서 극단적 상태와 지점에 있는 홈리스조차도 다른 사람과 관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홈리스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밥을 먹으려면 동냥을 하거나 쉼터에 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홈리스까지 살펴볼 필요도 없다.
홈리스가 아니라도, 누구든 살아 숨 쉬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밥만 먹고살려고 해도, 밥값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일을 하려면 누군가에게 고용되어야 한다. 이처럼 호흡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만나거나 친분을 쌓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은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난 후 여지없이 느끼게 되는 아쉬움과 공허함 때문에 사람 만나는 걸 피해 왔던 것임을 깨달았다.
지인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 즐겁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든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면 얼마나 아쉬운 줄 모른다. 헤어짐이 있기에 이별이 아쉽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기대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헤어져야 할 때마다 더 함께 있지 못해서 너무나 아쉽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는 마음이 허전하다. 그 아쉬움과 허전함이 지독히도 싫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걸 피해왔던 거라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지난 주말에 아내 지인들이 집에 놀러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홈리스의 자활을 돕는 일을 수년간 했던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고시원에서 고독사가 발생하면 빨리 발견되지만, 원룸에서는 몇 주가 지나도 아무도 모른다.”
의외였다. 고시원이나 원룸이나 매한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유를 들어보니 그렇겠구나 싶었다.
고시원에 기거하는 사람들은 처지가 비슷해서 알게 모르게 서로 신경 쓴다고 한다. 그래서 고독사가 발생하면 빨리 발견된다고. 하지만 원룸은 서로 전혀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옆집 사람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니 누가 죽어도 전혀 모른다고. 여기에 구조도 한몫할지도 모르겠다. 고시원은 방이 작아서 그만큼 시체 냄새가 빨리 퍼지니까. 그게 아니라도, 고시원은 원룸에 비해 사회적 단절도가 비교적 덜하다. 공동생활 공간이 있으니까. 그 공간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다. 그 접촉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 대한 무의식적인 관심을 유지시켜 줄지도 모르겠다. 그 관심이 안타까운 고독사로 명을 달리한 이웃에 대한 비교적 빠른 조치로 이어지는 게 하는 게 아닐까. 쓰다 보니 우울해진다.
분가하기 전에는 누군가 우리 집에 오는 게 싫었다. 손님이 있으면 신경이 쓰여서 거실과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기 불편하니까. 얼마나 싫었으면, 손님이 있는 동안에는 몇 시간이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오줌보가 터지려 하는 데도 꾹 참으며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집에 손님이 오는 게 좋다. 오죽했으면 돈을 많이 벌어서 일하지 않고, 매일 집에 지인들을 초대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지인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즐거우니까. 곁들여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어둡게 살았던 지난 시절에 대한 반성이랄까? 지나간 시간을 만회하기 위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혼자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지는 않다. 죽은 지 몇 주나 지났는 데도 아무도 모른 채 내 시체가 썩으면 어떡하나. 아무리 죽으면 그만이라지만, 전쟁통에 폭격으로 몸이 산산조각 난 게 아닌 이상 어딘가에는 뿌려져야 한다. 그전에, 지독한 냄새로 주변에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그러려면 빨리 발견되어야 한다. 백골이 되도록 방치된다면, 생각만 해도 우울하고 슬프다. 아니 비참하다. 어쨌든 매일 집에 사람이 와야 혹시 급사를 하더라도 내 시체가 빨리 수습될 수 있지 않겠나.
별 생각을 다 한다 싶지만, 죽고 나서도 누군가에게 신세 져야 할 걸 생각하면,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음을 여실히 느낀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도 사회적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