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은 세후 146만원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금액이지만, 거의 십 년 전인 그때도 적은 금액이었다. 당시 최저 시급이 4,320원이었고, 주 40시간제 사업장 기준 최저임금은 월 902,880원이었으니 내가 받은 월급은 생각하기에 따라 많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알바를 하며 벌던 돈이 140만원이었고, 무슨 일을 하든 웬만하면 160만원 이상을 족히 받던 시절이었으니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다.
월급을 받고 수중에 남는 돈은 차비와 밥값을 떼면 고작 123만원이었다. 외근직이어서 차비가 많이 들었는 데도 차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식대는 월급에 포함된 상태였으니 실질 임금이 그 수준이었다. 직전에 알바를 했을 때는 일하던 곳이 집과 가까워서 차비가 전혀 들지 않았고, 식대도 지원받아서 140만원이 고스란히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런데 명색이 ‘회사’라는 곳을 다녔는 데도 받는 돈이 알바보다 못했으니 허탈했다.
그렇게 받을 거면 그런 데를 왜 들어갔냐고? 박봉을 받고도 들어간 이유가 있다.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돈을 포기하고 그 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첫 직장이 중요하다고, 그 회사에 들어간 덕에 지금도 동종 업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거진 십 년이 된 지금은 솔직히 그 회사에 들어간 걸 후회한다. 당시에는 전혀 후회가 되지 않았고, 박봉이어도 상관없었다. 박봉에도 기분 좋게 일했다.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 꿈의 직업이었으니까. 그러나 꿈을 이루어 겨우 밥은 먹고살았지만 처자식이 생기니 생각이 달라졌다. 현실 앞에서는 꿈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른 업계로 전직할 기회가 있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고 싶어서 넘어가지 않았다. 그로 인해 빈궁한 처지에 빠졌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생기니 지금 받는 월급으로는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기 힘들게 되었다. 아기가 생기기 전에는 형편이 그나마 나았다. 맞벌이를 했으니까. 아내와 함께 벌었을 때는 박봉이어도 아무 문제없었다. 다달이 들어오는 돈이 두 배 이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아기가 생기고 외벌이를 하게 되니 문제가 생겼다. 내가 받는 월급으로는 가정 경제를 유지 조차 할 수 없었다. 재정 적자에 빠지기 시작했다. 맞벌이할 때 아내가 착실히 돈을 모아둔 덕에 얼마간 버틸 수는 있지만, 그뿐이다. 내년에는 다시 맞벌이를 시작해야 한다. 아내가 육아에 전념하게 하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슬퍼진다.
상황이 이러니 첫 직장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다른 업계를 통해 사회에 발을 들였으면 사정이 나아졌을까? 무의미한 가정이다. 역사에 만약이 없듯이 개인사도 마찬가지니까. 시간을 되돌리는 건 의미가 없다. 되돌릴 수 없으니까.
문제의 원인은 첫 직장에 있는 게 아니다. 잘못된 부의 분배 구조에 있다고 믿고 싶다. 사장들은 많이 가져가서 배불리 먹고, 직원들에게는 푼 돈을 쥐어 주는 잘못된 부의 분배 구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꼬우면 네가 사장해!”
누군가 정말 이렇게 말한다면, 한 마디만 할 것이다.
“가서 네 할 일이나 해라.”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다. 상황을 읽지 못하는, 생각 없는 말이기에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 저런 말을 할 사람이면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게 확실하니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아무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진 자기 더 가진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돼지들과 같이 말이다. 물론 『동물농장』은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한 우화이기에 다른 면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전체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과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가진 자만 더 가질 수 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지지 못한 자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도기에서 일 뿐,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가진 자가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질 기회를 점점 잃게 된다. 소위 말하는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다. 가지지 못한 자도 가질 수 있는 방법과 길을 가진 자가 모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진 자가 혼자 누리기 위해 가진 것을 꽉 움켜 쥐고 가지지 못한 자와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무얼 얼마큼 나눠야 하는지는 따로 따져 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서민은 죽을 때까지 서민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서민은 계속 서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민들은 팍팍한 삶을 살아간다. 적은 월급으로 꾸역꾸역 살아간다. 월급이 적다고 해서 무조건 삶이 팍팍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것도 아니다. 월급이 적다고 삶이 힘겨워지는 건 아니지만, 여유롭지 못한 건 확실하다. 힘겨워지느냐, 여유를 느끼느냐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아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건 그저 자기 위로일 뿐이다. 그렇게 자기 위로를 해봤자 삶은 그대로다. 나아지지 않는다. 물론 삶은 나아지지 않은 자기 의로를 하든 무얼 하든, 이왕이면 어떻게 해서드 마음 편히 지내는 게 좋긴 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리 쉽게 잡아지던가?
나는 146만원으로 뭘 했을까? 저금도 하고, 옷도 사고, 먹고 싶은 음식도 먹고, 사고 싶은 물건도 사고...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했을까? 아니,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월급이 적었으니까. 하고 싶은 걸 다 했다가는 남는 게 없을 테니 최대한 아껴쓰고 저금했다. 그래서 많이 저금했냐고? 그렇지도 아니다. 보험료에 핸드폰 요금에, 고정비가 나가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아서 저금도 많이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도대체 왜 그리 살았나 싶다. 꿈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하며 악착 같이 살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악착 같이 산다고 삶이 더 윤택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지금쯤이면 외벌이가 가능할 만큼은 벌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다. 아니, 사실 부자가 되고 싶긴 하지만 부자가 될 만한 능력이 없다. 그러니 그저 외벌이로 가정 경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벌고 싶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내 노력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면 앞에서 말한 대로 부의 분배가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난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