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연습 #18
모름지기 사과를 할 때는 “잘못했어” 한 마디면 족하다. 변명은 필요 없다. 변명을 하는 순간 사과는 더 이상 사과가 아니다. 변명을 단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자기변호로 변질된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잘못을 하면 “잘못했어”라는 말만 하면 된다.
언젠가 직장 상사 때문에 곤욕을 치를 뻔했다. 사건 자체는 별일 아니었는데 그가 한 말 때문에 나만 나쁜 사람이 될 뻔했다.
사모님 : “전 과장, 옥상에 잠깐 올라갈 수 있어요? 옥상 공사하는데 10분만 도와주면 돼요.”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한 사람은 사장님 사모님이다. 사장님은 우리 회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의 건물주이다. 건물 관리는 사모님이 도맡아 한다. 안 그래도 오전 업무로 정신없이 바쁜데 회사 일도 아니고, 회사와 상관없는 일로 도와달라니 갑질 아닌 갑질에 황당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갑질이야 한두 번이 아니라 무뎌져서 그러려니 했지만, 하필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에 쓸데없는 일을 시키니 곤혹스러웠다.
나 : “사모님, 죄송합니다. 오후면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지금 오전 업무로 바빠서 도와드리기 힘들 것 같아요.”
더 이상 갑질에 끌려 다니기 싫어서 용기 내어 사실을 전했다.
사모님 : “기사가 옥상 빗물받이 수리하는 데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 잠깐 시간 안 되나요?”
아니, 큰일도 아니고 고작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 때문에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다니 무척 황당했다. 그렇게 쉬운 거면 맨날 집에서 노는 당신이 지켜보면 되는 것을.
나 : “아, 네. 사모님. 죄송하지만 지금 너무 바빠서요.”
사모님 : “그럼 다른 남자 직원한테 올라가라고 하면 안 되나요?”
나: “네. 다른 남자 직원들도 외근 나가서 힘들 것 같아요.”
사모님 : “알았어요.”
찍힐 걸 각오하고 방어했다. 사실 다른 남자 직원들은 외근을 나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외근 준비 중이었다. 이번 일을 허용하면 앞으로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킬지 몰라서 거짓말을 했다. 사모님과 통화를 마친 후 불과 1분 뒤에 부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장님 : “전 과장, 사모님 전화가 왔는데, 옥상 가서 도와줄 수 없나요? 사모님께 전 과장이 지금쯤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나 : “네?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제가 방금 전에 사모님께 바빠서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거짓말한 게 되잖아요!”
부장님 : “사모님께는 바빴는데 한가해졌다고 하면 되지.”
사모님 : “방금 전에 바빠서 안 된다고 했는데, 몇 분만에 한가해졌다고 하면 제가 안 올라가려고 거짓말한 걸로 생각하시죠.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부장님 때문에 나만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렸다. 나와 모든 남자 직원들을 보호하려던 내 노력은 성공했지만, 나만 나쁜 직원이 되고 말았다.
부장님 : “전 과장, 미안해.”
다음 날 아침에 나를 보자마자 부장님이 사과하셨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 실수는 실수고, 내가 찍힌 게 확실하니 투정은 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투정하기도 전에 이어지는 부장님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부장님 :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누구라도 갔어야 해..”
나 : “저는 남자 직원 전부 바쁘다고, 부장님도 보호해 드렸는데, 부장님은 혼자 사시려고 저를 죽이셨네요...”
부장님 : “죽이긴 뭘 죽여. 안 그럼 내가 갔어야 해.”
나 : “그럼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드린다고 하시면 되지 왜 제가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씀하세요. 어차피 제가 올라가야 하긴 했는데, 그럼 바쁜데도 겨우 시간 내서 올라간 걸로 어필해야 제가 면이 서죠.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근데 부장님 말씀 때문에 안 바쁜데 제가 가기 싫어서 바쁜 척한 게 됐잖아요.”
부장님 :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나보고 올라가란 식으로 말씀하셔서.”
계속되는 변명에 화가 나서 더 쏘아 부치고 싶었지만, 상사라서 어쩔 수 없이 참았다. 이유야 어쨌든 여기까지 말한 것도 상사에게 대든 것이니 더 뭐라 할 수 없었다.
부장님의 대응이 어설펐던 건 이해한다. 일부러 나를 깔아뭉개려고 그러신 게 아닌 걸 나도 아니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부장님의 말씀에 화가 났다.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셨으면 됐는데, 변명을 하시니 화가 났다. 변명도 그럴듯하게 하시면 그마저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정도로 내가 꽉 막힌 사람도 아니고, 윗사람에게 뭐라 할 수도 없니까. 하지만 사과를 하는 듯했지만, 당신은 잘못이 없다는 듯 계속 면죄부를 제시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사과를 할 때는 사과만 해야 한다. 사과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행위이니까. 사과와 변명은 상극이다. 변명을 하는 순간 사과의 진정성은 즉시 사라진다. 변명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항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잘못한 사람이 사과를 하긴 했는데 곧이어 변명을 하면 당한 사람의 인식 속에는 변명만 남는다. 상대방은 사과를 하지 않은 걸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만 해야 한다.
물론 잘못한 사람이 억울할 수도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변명이 하고 싶어 진다. 억울하니까. 억울함을 풀고 싶으니까. 그렇다면 사과를 한 후에, 상대방이 용서한 후에 해명하자. 상대방이 사과를 받은 후에 억울함을 풀어도 늦지 않는다. 괜히 당장 억울함을 풀려고 하면 사과도 제대로 못하고, 억울함도 못 풀게 된다. 상황은 더 악화된다. 그러니 일단 사과만 하자.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준 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면, 방심하지 말자. 어설프게 해명했다가는 도루묵이 된다. 해명할 기회가 생가면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뉘앙스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설명하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자. 주관적인 설명을 잘못 덧붙이면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우리는 잘못을 사과하기보다는 핑계나 변명을 먼저 대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확실한 경우에는 민망하니까. 책임을 피하고 싶으니까. 외부 원인으로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을 때는 억울해서 억울함을 풀려고 해명을 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다 부질없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런 건 저 멀리 던지고 사과만 해야 한다. 어떤 이유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행해야 할 최선의 행동은 사과뿐이다. 사과에 다른 걸 덧대고 싶은 유혹을 떨쳐야 마침내 변명이든 해명이든 할 기회가 주어지니 괜한 욕심부리지 말고 사과만 하자. 설령 변명이나 해명을 할 기회가 생기지 않아도 억울해하지 말자. 당한 사람이 사과를 받아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해피엔딩, 완벽한 결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