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풍경에 호강하는 나의 뇌
봄날은 개울가에서 먼저 온다
물여치가 물 위를 유유적적 떠돌다
구름 몇 조각 방생하고
송사리떼는 맑은 흙살을 헤집으며
한들한들 거리다
수초에 물그물을 치고 봄날을 재촉한다
어머니가 빨래를 한다
구겨진 바지를 팍팍 때려풀어
흙비누로 절망을 바닥바닥 문질려
얼룩을 지워내고
흐르는 물로 흐르는 주름을 펴고
베인 절망을 두들겨 팬다
물빛에서 부는 바람이 밝다
부는 바람이 강아지풀을 쭉 훑어
작은 못에 흩뿌리고
물장구치는 햇빛의 흰 엉덩이를 연신 찰삭찰삭 때린다
큰비가 내려 다 떠내려가도
겨울 찬바람에 모두 다 얼어붙어도
개울가 샛풀은 화들짝 다시 피고
다시 수수하게 지고
올해 겨울은 유달리 추웠다. 난 경남 창원에 산다. 그날은 구정 바로 다음 날인 2023년 1월 23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려고 차 시동을 걸었다. 차 안의 온도계가 영하 10도를 찍었다. 마음속으로 놀랬다. 여기 창원에서 아무리 추워도 영화 3, 4도 정도였는데! 학교에 도착해 얼른 난방 스위치를 눌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난방 시스템에 빨간 불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난방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고장이 난 것이다. 내일까지 연휴라서 학교에 수리 요청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냥 창문을 꼭 닫고 옷을 두껍게 끼어 입고 평상시처럼 책도 보고 글도 썼다.
인간의 몸과 감정이란 참 신비롭게 서로 교류하는 것 같다. 날씨가 너무 춥다 보니 내 몸은 계속 추위를 느낀다. 그러면서 나로 모르게 화라는 감정이 치솟아 오르고 절망을 느낀다. 너무 추운 연구실 공간에서 내 몸과 내 감정이 더는 다치지 않도록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일러를 켜고 장판을 따뜻하게 하고 나니 화도 가라앉고 절망감도 사라졌다.
지금은 3월이다. 1, 2월의 추운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이다. 시인의 말대로 봄은 개울가에서 가장 먼저 찾아온다. 봄이 와서 날씨가 풀리자 물여치와 송사리떼가 활동을 시작한다. 물여치가 물 위를 유유히 떠돌면서 지나간 곳에 구름이 몇 조각 비친다. 시인은 물여치가 이런 구름을 잡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놓아 주면서 방생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어부들이 고기를 잡다가 너무 작은 물고기는 바로 방생한다. 방생은 작은 물고기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친절한 행위이다. 나중에 다 자라면 다시 잡아먹겠지만, 꼭 오늘 방생해 준 그 물고기가 그 어부에게 다시 잡히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방생을 한다. 봄은 생명의 시작되는 시기이다. 물여치가 구름을 방생하는 것은 봄이라는 때에 맞게 구름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봄적 행동이다. 송사리떼는 맑은 흙살을 헤집으며 한들한들 거린다. 송사리떼의 한들거림으로 수초에는 촘촘한 그물 모양의 무늬가 생긴다. 송사리떼 또한 봄날을 재촉한다.
개울가에서 어머니가 빨래를 한다. 어머니는 구겨진 바지를 팍팍 때리고 문지른다. 겨울 동안 덕지덕지 붙은 절망을 지워내기 위한 어머니의 행동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다가오는 겨울이 되면 이 바지에 다시 절망이 베일 거라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바지를 때리고 문지르면서 바지를 단련시키고 있다. 바지를 비롯해 우리가 입는 옷은 인간의 몸과 가장 가까이 있다. 인간의 몸을 단련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몸을 힘들게 하면 된다. 근육운동을 하든, 조깅을 하든, 운동을 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새벽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산책하는 모습을 그려보자. 이분들은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앞으로 그리고 등 뒤로 치면서 걷는다. 큰 나무가 보이면 멈춰 서서 나무에 등을 탁탁 부딪친다. 우리의 소중한 몸을 왜 그렇게 탁탁 때리는 것일까? 그것은 몸을 단련하는 것이다. 몸에 가장 가까이 있는 바지도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어머니는 단련시키고 있다. 바지를 때리고 문지르면서! 인간의 뇌도 일종의 몸이다. 뇌를 단련시키는 방법도 바지와 우리 몸을 단련시키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뇌를 운동시켜야 한다. 뇌를 운동시킨다는 것은 많은 실패를 해 보라는 것이다. 물론 고의로 실패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실패했으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그 실패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실패가 곧 나의 뇌를 단련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흐르는 물’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절망이 베인 바지의 주름을 펴 주는 것이 흐르는 물이다. ‘그냥 흐름을 따른다’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결국은 무언가를 해내는 결과를 이뤄내기도 한다. 정치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정치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실 그는 정치를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엄청난 힘으로 정치를 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해 낸다. 이것이 흐름의 매력이고 흐름의 마법이다. 이런 흐름으로 베인 절망은 나도 모르게 사라지게 된다.
봄날의 개울가 풍경은 시각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구는 “물빛에서 부는 바람이 밝다”이다. ‘물빛’과 ‘밝은 바람’은 봄날의 개울가 풍경을 매우 잘 대변하는 시각적 모습이다. 물에서 빛이 나고 바람은 밝다. 이런 밝은 바람이 강아지풀을 쭉 훑어서 작은 못에 흩뿌린다. 날린 강아지풀은 물빛에 비친 햇빛과 부딪치면서 마치 그 햇빛의 엉덩이를 연신 찰싹찰싹 때리는 것 같다. 찰싹찰싹 때리는 모습은 어머니가 절망을 지우기 위해 바지를 팍팍 때리는 것과 대비된다. 찰싹찰싹 때리는 것은 사실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만지는 것이다. 물빛과 밝은 바람은 물장구를 치면서 같이 놀고 있다. 바람은 강아지풀을 이용해 햇빛에게 장난을 걸고 있다. 물과 바람이라는 두 자연이 정답게 장난을 치는 것을 보니 몸이 드디어 왔구나 싶다.
개울가에서 수수하게 난 풀은 큰비와 겨울 찬바람에도 꿋꿋하게 화들짝 다시 핀다. 추운 겨울이 되고 모든 것이 얼어붙으면 다시 질 것이다. 내년 이맘때 봄기운을 받은 개울가에서 다시 화들짝 필 것이다. 개울가의 풀은 반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반복은 우리 삶에서 지루함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해 삶을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사실 ‘일상의 삶’은 ‘반복’이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일상의 삶 자체가 반복이다. 일상의 삶에 내재해 있는 반복을 도려낸다고 해서 도려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도려낸다면 그 삶은 일상의 삶이 아닌 일회적 삶으로 전락한다. 반복을 받아들이는 사람, 아니 반복적 삶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반복이 싫은 사람은 보여주고 자랑할 것이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여 줄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 내가 반복되는 나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은 나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힘이 내 등 뒤에서 나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힘으로 물 흐르듯 반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개울가에 핀 풀이 다시 피고 다시 지는 반복의 삶을 사는 것처럼 나 또한 풀의 삶을 닮고 싶다.
봄날의 개울가 풍경이라는 이 시를 읽으면서 좋은 풍경화 한 점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 이상을 얻었다. 생명을 소중히 하는 물여치의 행동, 절망을 벗겨내기 위해 단련과 흐름을 실천하는 어머니의 행동, 물과 바람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조화, 반복적 삶을 실천하는 개울가에 핀 풀의 모습! 이런 봄날의 개울가 모습을 보니 나의 뇌가 호강한다!